입력 : 2015.12.01 17:33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 필요한 노력

발칸반도의 첫 여행지, 알바니아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24시간이나 걸렸다. 새벽에 집을 떠나 이스탄불을 거쳐 밤이 이슥해서야 발칸반도의 끝자락 알바니아의 티라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라기보다는 시골 터미널 정도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호텔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참으로 먼 나라. 이름도 생소한 이 나라에 내가 발을 디디리라고는 이삼 년 전에도 예측하지 못한 미지의 나라다. 학생 때는 공산주의 나라라고 너무나 멀리에 있었던 나라다. 요즘에서야 신문이나 TV에서 간간이 그 이름을 듣게 되었다. 시리아 난민들이 독일이나 프랑스 등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나라라는 걸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되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버스가 공항을 떠나 어두컴컴한 길을 더듬대며 달리고 있다. 간간이 보이는 주황빛 가로등은 있으나 마나 내 어렸을 적 골목길을 비추던 30촉 전구 밝기밖에 안 되었다. 그것도 어쩌다 드문드문 있으니 있으나 마나한 길이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길가의 마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에 잠긴 도시에 많은 집이 호롱 빛 정도의 불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집들이 더 많았으니 아마 비싼 전기세 탓에 불을 켜지 않았으리라. 흡사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모습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코로 스미는 냄새는 어딘가 익숙하다. 나라마다 독특한 냄새가 있는데 이 냄새는 추억 속 어딘가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냄새다. 처음 공항에 내릴 때부터 다가왔던 냄새가 친숙하다 했더니 알바니아에서의 난방이나 취사는 나무를 때서 한다고 한다. 요즘은 갈탄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하니 익숙한 냄새일 수밖에 없다. 그 냄새에 옛 추억에 잠겼는데 가이드가 열악한 경제 때문에 겨울이라고 따로 난방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들거리고 밤에 자야 하나 싶어 공포감이 슬며시 밀려든다.

[발칸반도 여행 에세이] [1] 알바니아

달리는 버스가 어째 수상타 했더니 길을 잃었다. 버스 기사가 먼 나라 크로아티아 사람이란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알바니아를 거치는 경우가 드물어 가이드도 초행길이다. 버스 기사도 초행길이고 가이드도 초행길이니 버스가 헤매는 건 당연하다. 알바니아가 초행길인 우리 또한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가다 묻고 가다 묻고 그러다 버스가 멈추기에 호텔인가 하고 내다보았더니 주유소다. 윤곽만 어렴풋이 보이는 주유소 마당에 서 있는 남자와 가이드와 버스 기사는 각각 다른 언어로 길을 묻는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졌다.

우리야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니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주유소 마당에서 대답하던 남자가 버스에 올라탄다. 어둠 속이라 희미하지만 수더분해 보인다. 가이드가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겠다고 자청해서 올라탔다고 통역해 주어서 손뼉까지 치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그다음 벌어질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두운 길을 버스는 그 남자가 가자는 대로 갔다. 구불구불한 옛 60년대 우리의 골목길 같은 길을 버스는 덜컹거리며 갔다. 그러다 어느 으슥한, 간혹 보이던 가로등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버스는 멈추고 그 남자는 어슬렁어슬렁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그 남자가 자기 집으로 가 버린 것을 안 다음이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버스 기사의 아이디어로 택시를 앞세우고 전화를 받지도 않는 호텔을 찾아든 다음 날 아침. 반짝이는 햇살을 따라서 우린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 중심가로 갔다. 햇살은 반짝이는데 우울한 거리, 어디를 둘러보아도 출근길 아침인데 활기라고 보이지 않았다. 실업률이 70%에 육박한다고 하니 가히 알만하지 않은가. 엔베르 호자란의 40년 독재와 오랜 내전으로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까닭이다.

관광이라야 이 나라에서는 아직 미개척분야라 보고 싶었던 고대 도시 지로카스터는 패키지여행에 끼어있지 못해 가지 못하고 수도 티라나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보았다. 알바니아의 민족영웅이라는 스칸데르베그 동상. 이 사람은 우리의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알바니아인들에겐 영웅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슬람교의 성전인 모스크, 이층 높이의 작고 아담한 국회의사당, 엔베르 호자란의 독재 흔적이 남아있는 녹슨 벙커, 티라나 광장 한 켠에 있는 작고 낡은 그래서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오페라 극장. 알바니아가 예전에 공산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박물관 벽의 붉은 깃발을 들고 걷는 혁명동지 그림을 보고 돌아서니 보이는 건물 한 동.

그냥 길옆에 있는 회색빛 3층 건물이라 가이드가 대학이라고 안 했으면 그냥 상가 건물이라 했을 터였다. 알고 보니 그 건물은 알바니아에서최고의 엘리트를 배출하는 국립대학이란다. 이 국립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자기 나라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주변의 잘 사는 나라로 떠난다고 한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찾은 일자리가 좋을 리가 없다. 겨우 알바 수준의 일을 얻어 버는 돈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그나마 알바니아가경제가 조금씩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한다.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떠난 타지에서 그들의 고생이야 들여다보지 않아도 잘 안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과 이별의 아픔을 맛보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독일 광부와 간호사들이 그랬고, 덥고 습한 베트남으로 간 사람들이 그랬다. 뜨겁디뜨거워 달걀을 깨서 모래 위에 놓으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는 중동으로 간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의 이별의 아픔과 흘린 땀의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새삼 일깨워 준 알바니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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