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17 10:37

회색빛이 인상 깊었던 몬테네그로를 떠나 드디어 ‘꽃누나’ 촬영지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제일 먼저 구경나선 곳이 두브로브니크다. 초호화 유람선이 필수로 기항하는 항구도시로 16세기에 지어진 성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빛바랜 붉은 지붕으로 물든 구시가지도 그대로인 아름다운 낭만 도시다.

▲두브로브니크 해안마을.
▲두브로브니크 해안마을.

성벽을 따라 짙푸른 아드리아 해가 펼쳐지고 모래사장이 잘 발달한 휴양지이기도 해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스르지산 정상까지는 꽃보다 누나들도 이용했던 그 오렌지색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두브로브니크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다니 벌써 마음이 두근거린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에 에피다우루스가 슬라브와 아바르를 약탈했을 때 도망 나온 로마 피난민들이 동남쪽 지역에 자리 잡고, 이름을 라우사 또는 라구시움이라고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지명 두브로브니크란 말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작은 숲(dubrava)’을 뜻한다. 아드리아 해 남쪽 연안에 있으며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면적 1,782㎡, 인구 4만 3,770명(2001)이다.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온 곶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해안 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오래된 성벽은 대부분 2겹으로 지어졌다.

두브로브니크는 석회암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곶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항구의 해안 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거대하고 둥근 탑이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굽어보고 서 있다. 대부분 2겹으로 지어진 성벽은 오래전부터 이곳의 자랑이었다. 성벽 너머로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별장이 많이 있다.

이 도시의 초기 도시계획은 1292년의 화재 후 항구를 다시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272년까지 라구사의 라틴 섬과 두브로브니크의 숲 속 거주지를 나누어주는 습지대였던 계곡을 따라서 이곳의 주도로인 스트라둔이 쭉 뻗어 있고, 그 길 양옆으로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웅장한 성벽.
▲두브로브니크의 웅장한 성벽.

이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에도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크로아티아가 1991년 유고연방에서 탈퇴하려고 하자 이 나라의 독립을 막으려던 유고연방과 내전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두브로브니크가 바람 앞의 등불이었을 때 많은 유럽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다. 이 유적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은 급기야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 띠를 만들었고 두브로브니크를 살려냈다.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도 오늘 이곳에 와 숨 막히도록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두브로브니크 관광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도시란 넓은 땅과 강을 끼고 발달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스르지산이 곧바로 우뚝 솟아있고 산과 바다 사이사이 좁은 땅 위에 시내가 발달하여 있다. 꼭 절벽 가파른 곳에 조그맣게 마을이 형성된 산토리니 같은 느낌이 드는 도시다. 짙푸른 아드리아 해를 바라보며 세워진 집들이 하얀 벽과 새파란 지붕 대신 붉은 지붕이 있다는 정도가 차이라고나 할까.

사실 아침 일찍 나서긴 했지만 어젯밤에 이곳에 도착해 한밤중에 둘러보았다. 아침까지 기다리기엔 너무나 멀어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나왔었다. 가이드도 없이 발길 가는 대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둘러보았었다. 아드리아 해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행여 넘어질까 조심조심 걸으며 너무 밤늦게 구경 나섰던 탓에 카페거리나 상점들의 문이 닫혀있는 바람에 비록 야경다운 야경을 제대로 구경할 순 없었지만 화려하지 않은 조명 속에 단아한 모습의 풍경이 인상 깊었다.

어젯밤에 본 풍경이 검은 벨벳에 그려진 유채화 풍경이었다면 오늘 아침에 보는 풍경은 한 폭의 선명한 수채화다. 어젯밤에 그러했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길을, 길이라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다리를 걸어 ‘필레게이트’ 앞에 섰다. 어젯밤 아무도 들이지 않을 듯 같던 철옹성이 빛나는 햇살 탓일까. 오늘 아침엔 친근하게 다가온다.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문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필레게이트’ 앞 다리 밑으로 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 놓은 운하가 말없이 유유히 흘러간다. 석조 건물 사이로 난, 대리석의 반들거리는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다. 비수기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일까?

오래된 고성이 속삭이는 은밀한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맛이란 작은 감동이다. 하얀 대리석이 깔린 플라차 거리를 걷는다. 커피 광고에 고현정이 나오던 그 거리다. 공중전화에서 전회를 걸다가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뛰어나오던 바로 그 거리다. 마음 밭 추억 한 자락을 대리석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플러차 거리는 내가 왔다 갔음을 기억해 줄 거라 믿으며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오노프리오라고 불리는 작은 분수대와 그 앞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온화하고 푸근한 얼굴로 나를 맞는데 정문 위로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픈 얼굴을 한 피에타상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 종교를 떠나 자식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마음이 내게 전해져 온다. 나도 자식을 둔 어미 아닌가.

짠한 마음을 안고 고딕, 르네상스가 혼합되어 지어졌다는 스폰자 궁전으로 갔다. 우선 스폰자 궁전의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층은 분명 아치형으로 지어졌는데 2층은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유럽에서 유행한 건축방식이 투박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3층을 올려다보았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3층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고딕 양식은 인물의 자연스러운 묘사이다. 그리스도상과 마리아상이 많이 제작되는데, 많은 유리창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한 건축 양식이다. 한 건물에 각기 다른 건축 양식으로 설계되고 지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증축을 한 모양이었다. 부럽다, 낡은 것은 무조건 헐고 보는 우린데.

스폰자 궁전을 보고 나서 그 앞에 있는 렉터 궁전을 보고 나니 성벽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만리장성을 올라 둘러 본 경험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런 코스다.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어쩌지? 저 높은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할까. 뭐 죽기라도 하려고. 이제 겨우 나아가는 족적근막염을 앓고 있는 발을 힘 있게 내디딘다. 발바닥에서 작은 통증이 밀려온다. 그래 내가 언제 또 여기에 온다고. 가자 정상으로. 다시 아프면 그땐 그때 치료하지 뭐.

거칠게 다듬어진 계단을 하나 둘 오를 때마다 아래서 보지 못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형성된 항구와 성채, 요새의 성곽들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도시의 모습은 온전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지그재그로 끝없이 이어진 성곽 길을 오른다. 1518년에 축조한 돌산 위에 자리한 고대 석조 교회와 어우러진 아드리해 바다를 보는 순간 발바닥의 아픔쯤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환성이 터진다. 채 가보지 못한 작은 골목길, 담벼락에 널려있는 빨래들, 탈탈 담요의 먼지를 털어내는 아낙네, 멀리 두브로브니크 내항으로 진입하는 선박들과 요트들의 풍경은 말 그대로 꿈결이다.

꿈결 속에서 플라차 거리 양쪽에 늘어 서 있는 한 카페에 앉아있다.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으며 옛것 속에 들어 현대가 숨 쉬는 공간이 부럽다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온다. 우리의 문화는 어디로 가는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해서, 끔찍했다고 그 잔재를 털어낸다고 부숴버렸다. 그 자리에 번쩍이는 건물을 짓는다고 지나간 역사가 되돌려질까. 내 재산이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바람에 한밤중에 포크레인을 동원해 부숴버린 자리에 흉물로 서 있는 어느 극장. 짧은 생각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스미어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망가트려 가는 모습이 한없이 안타깝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