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을 보거나 읽게 되면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또 역사의 현장에 가게 되면 그 곳에 그 시절에 가 있는 듯, 그 속에 내가 묻혀 생활하는 듯한 한 착각을 하게 된다. 내 고장 곳곳에 선인들의 발자취가 어찌 찍혀 있을까? 생활 모습들은 어찌 지금까지 전해 내려 왔을까? 사람은 가고 없어도 선인들의 숨결이 이 고장에 고스란히 남아 나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든다.
80년 대 초, 군(郡)에서 의뢰 받아 내 고장 곳곳을 누비며 유적, 사적 조사를 할 때, 정말 그 시대에 들어가 사는 듯한 생각을 했다.
특히 조선조 대원군 시절에 천주교 전래의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있는 곳, 내 고장 충북 진천 배티성지 조사를 지정받아 섭렵하던 중, 가슴 뭉클한 감회를 안고 그 곳을 찾게 된 것이 수 차례, 그 첫 인연부터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자료와 안내를 받기 위하여 진천 천주교 본당을 찾았다. 그 곳에서 얻은 자료가 배티 성지 기사가 실린 카톨릭신문 한 장, 그리고 ‘은화(隱花-윤의병 신부 지음)’ 란 제목의 천주교 박해 소설, 그리고 보여 준 자료가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사금파리였다. ‘신문 기사 하나와 사금파리’ 이야기를 얼른 먼저 하고, 소설과 현장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신문 속의 이야기는 너무나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 박해 시절에 천주교인들은 산 속에 숨어 살며, 옹기를 구워 생활 수단을 삼았는데, 관청 포교들의 급습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옹기 굽는 가마 속 깊숙이 미사를 드리다가 포교들이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옹기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니, 아, 얼마나 얼마나 그 속에서 뜨거웠을까? 신앙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할 일이었으리라!
구부러진듯한 모습의 물고기 형상이 그려진 사금파리 조각은 곧 십자가를 상징하며, 몸을 숨겨 다니며 서로를 모를 때 신자의 징표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조사하여 안 일이지만, 그 물고기 형상은 로마시대 박해를 받을 때, 자기들 만의 비밀스런 암호로 사용하였으며, 물고기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ΙΧΘΥΣ(익스투스)’라는 글자를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모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한다.
그 책 ‘은화(隱花)’를 빌려, 읽고 또 읽었다. 진천군 백곡면 배티 골짜기를 중심 무대로 하여 쓰여진 장편 소설인지라 더욱 실감이 났다. 당시 교우촌이었던 곳이 15군데나 친근한 부락 지명으로 현재도 고스란히 있지 않은가!
소설을 읽으면, 과연 이 곳을 ‘로마의 카타콤브(초기 그리스도인의 은산처 및 활동무대였던 지하 공동묘지)’ 에 비추어 ’한국의 카타콤브라 할 만 하다’ 한 것이 실감이 난다.
이성칠이란 신도는 자기 부모와 함께, 같이 사는 아내가 신자인지도 모른 채, 숨겨가며 미사를 몰래 드리고, 그 부인도 험하고 위험한 산길로 친정에 가서 미사를 드리곤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 양가가 신자임을 알고 부등켜 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성사를 받기 위해 상제로 변장한 서양인 신부를 모시고, 기쁨과 눈물의 모임을 갖고, 교인들의 기지로 위험을 벗어난 이야기, 천주교 신자를 하나라도 더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된 포교들과의 밀고 당기는 긴박한 숨바꼭질 등, 종교 소설이지만 일반인도 진한 감동 속에 흥미진진하게 손에서 떼지 못하고 읽을 소설이었다.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이곳 배티에는 성지임을 알리는 현양비 하나만 동그마니 서 있었는데, 현재는 성당, 영성관, 배티 순교박물관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우리 나라 최초의 신학교 초가 건물이 복원되어 소박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고 있으며, 곳곳에 순교자들의 묘소가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김대건 신부이래 두 번 째 신부인 토마스 최양업 신부의 활동 무대이기도 한 이곳은 해마다 많은 천주교 순례자 및 내방객들을 맞고 있다.
안내서에 보면, 이 곳을 네 가지 영성이 있는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비밀 교우촌, 최양업신부의 땀과 신앙이 어려 있는 곳,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톨릭대학의 효시), 순교자들의 본향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 천주교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신앙 선조들은 그 누구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산간 지대로 들어가 살아야만 했고, 바로 그 시절 배티 골짜기와 산 속 이곳 저곳에는 비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한다. 험지에 숨어 들어가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운영하였던 천주교인들,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기독교가 전래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