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21 09:28

시안에서 만난 세 번째 인물은 손오공으로 유명한 서유기의 삼장법사(三藏法師) 모델 현장(玄奘) 스님이다. 원래 불교에서 삼장(三藏)이라 하면 석가모니의 말씀인 경(經), 제자들의 생활규범인 율(律), 經과 律에 관해 읽기 쉽게 주석한 논(論)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經)ㆍ율(律)ㆍ논(論)에 정통하고, 이를 널리 유포(流布)하는 스님을 일컬어 삼장법사라고 한다. 즉, 삼장법사란 특정한 이를 지정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러한 스님들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인데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가 바로 현장(玄奘) 스님을 모델로 하여 지은 이야기라는 것이니 나름 대단한 스님임을 알 수 있다.


현장(玄奘) 법사(602~664년)

양귀비(719~756년)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과 러브스토리를 벌였으니 2대 황제 태종 때 구법(求法)에 나서 천축(天竺, 인도)까지 다녀온 현장법사는 그보다 100여 년 앞선 역사상 기록된 사실적 인물이다. 지금도 중국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처럼 모셔지는 분이다.

▲시안(西安) 대자은사 앞에 세워진 현장법사 동상, 뒤편으로 대안탑이 보인다.
▲시안(西安) 대자은사 앞에 세워진 현장법사 동상, 뒤편으로 대안탑이 보인다.

현장(玄奘)법사는 당나라 초기의 고승으로 그 당시에 홀로 석가모니의 천축(天竺, 인도)까지 다녀온 구법(求法)행적도 대단하지만, 사실은 그가 이룩한 업적의 금자탑은 불경 연구와 번역이다. 즉, 20세에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열심히 하던 현장 스님은 불경마다 내용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며, 종파마다 주장이 다른 점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는 인도에서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에 의해 쓰인 불경 원전이 제각각의 경로를 통하여 전해지면서 그 번역이나 해석이 구구 각색으로 이루어진 점을 간파하고 그는 자신이 직접 인도로 건너가 부처의 세계를 체험하고 부처의 말씀을 손수 가져오기로 한다. 게다가 인도에서 넘어온 전법승(傳法僧)들을 통해 날란다대학과 정법장(正法藏) 계현(戒賢) 스님의 명성을 들으니 더욱 가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진다. 그래서 당나라를 떠난 것이 27세 때인 629년이다.


천축(天竺, 인도)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다

당시 당(唐)나라 국법은 승려들은 한곳에 모여 살아야 했으며 누구나 국경을 넘어 나가는 것은 불법이었는데 현장 스님은 끝내 당국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무단출국을 하게 되니, 이를테면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한 불법(不法)행위라고나 할까? 이 문제는 나중에 귀국 후에도 한번 언급하게 되는데 아무튼 그렇게 고국을 떠난 현장 스님은 서유기에서처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의 경호부대 호위무사 없이 허름한 말 한 필에 의지하여 나 홀로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게 된다.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고비사막을 넘어야 했던 현장 스님은 목숨이 경각에 달리던 순간 오아시스를 만나게 되고 그렇게 목숨을 건지듯이 불심이 깊은 고창국(高昌國) 국문태(麴文泰)왕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대국(大國) 당(唐)나라에서 큰 스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국문태(麴文泰)왕은 불법을 설(說)하여주도록 현장 스님을 청하였으며 그리하여 열흘이나 머문 스님이 떠나려 하자 다시 앞을 막으며 국사(國師)가 되어 자신과 함께 그 나라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천축국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를 수차 설명하고 단호히 나서는 통에 국문태(麴文泰)왕은 그 앞길을 축복하면서 앞으로 지나야 할 나라의 왕들에게 안전통행과 편의제공을 요청하는 친서를 써주었고 노잣돈도 넉넉히 주어 떠나보내 주었다. 훗날 귀국길에 들리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당 태종이 소정방을 보내 고창국을 멸망시킨 뒤인지라 그대로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천축(天竺, 인도)에 도착하다

다시 길을 나선 현장 스님은 이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50개국 이상을 지나며 해골이 널린 사막과 인간이 넘기 어려운 설산(雪山) 산맥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인도에 들어선다. 인도 땅에서도 이곳저곳, 간다라 지방과 마투라 유적도 둘러보고 아쇼카 대왕의 대탑도 만나고 부처님이 나고 출가하여 깨닫고 최초 설법하고 열반하신 불교성지, 즉 카필라와 녹야원, 쿠시나가르 등도 돌아보았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고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날란다 대학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날란다 대학 종장(宗匠) 정법장(正法藏)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크고 웅대한 불교대학이었던 인도의 날란다 대학은 3세기경에 설립되어 세계각지에서 불교의 원류를 찾아온 스님들이 공부하는 대학이자 승원(僧院)으로 번성하였으나 7세기 이슬람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곳이다. 심지어 신라에서도 이곳까지 온 스님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권위 있는 곳이었으며 현장 스님이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대학 종장은 무려 106세가 된 노스님이었다.

▲인도 날란다 대학 유적지, 현장법사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학생 1만 명, 교수가 2천 명이라고 했다.
▲인도 날란다 대학 유적지, 현장법사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학생 1만 명, 교수가 2천 명이라고 했다.
그 스님은 이제 열반에 들어야겠다고 했는데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언제가 그때입니까 하고 묻자 지금 동쪽에서 한 비구가 오는 중이니 그를 맞아 대법(大法)을 전수해야 할 것이라는 답이었는데 과연 현장 스님이 오는 것이 아닌가? 사제지간이 된 두 사람은 열심히 가르치고 혼신을 다하여 배우니 십여 년이 어떻게 흘러간 지도 모를 지경이다.


현장 스님, 화려한 귀국

고국을 떠나온 지 17년 만에 돌아오게 된 삼장법사는 날란다 대학 종장과 여러 사람이 간곡하게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부처님의 올바른 말씀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부처님 사리 150과와 불경 650질, 불상 몇 구, 그리고 공부하던 자료들을 챙겨 귀국길에 올랐다. 떠날 때 무단출국이기에 귀국길에 걱정이 많았지만 당 태종은 그를 성대하게 환영하였다. 현장 스님이 가져온 경전과 불상, 사리들도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가 17년간 오가면서 체득한 서쪽 나라들의 정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였다.

인도를 떠날 때 북인도 왕의 호위를 받으면서 귀국길에 올랐으며, 당(唐)에 돌아오자 황제가 남문까지 마중 나와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백성들도 구름처럼 운집하여 꽃을 뿌리며 현장 스님을 반겨주었다. 정무(政務)를 도와달라는 황제의 요청도 거절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고 불법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하니 태종은 전폭적인 지원으로 현장스님을 도와주려 인도에서 가져온 불사리와 불경 등은 홍복사(弘福寺)에 봉안하고 역경 작업에 필요한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안탑(大雁塔) 건립하고 불경 번역작업

애초 모후 문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태종의 태자가 지은 대자은자(大慈恩寺)에 현장 스님의 발원으로 대안탑(大雁塔)이 세워졌으며 홍복사에 봉안되었던 유물들이 이곳으로 옮겨질 때는 온 도시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경전과 불상을 갖가지 종류의 수레 위에 안치하고, 불상 앞 양쪽에는 각각 큰 수레를 배치했다. 수레 위에는 깃발을 단 긴 장대를 두었고, 그 뒤에는 사자(獅子)가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당 태종과 황태자는 안복문(安福門) 누각 위에서 손에 향로를 들고 이를 보냈다’고 하니 장관이었을 듯하다.

이후 현장 스님은 대자은사의 상좌(上座)로 있으면서 절 북서쪽에 지어진 번경원(飜經院)에서 경전 번역에 몰두하였으며, 새로 건립된 서명사(西明寺)에서 거처하다가 다시 옥화사(玉華寺)로 옮기며 664년 2월 입적할 때까지 만 19년에 걸쳐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 사업에 힘쓰니 그가 번역한 경전은 모두 75부 1,335권에 이르렀다. 그 밖에도 이미 번역된 경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되거나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니 중국 불교계의 큰 스님이요, 역사에 길이 남을 행보를 남긴 것이다.

당시 현장 스님의 불경번역은 그동안의 번역에 대한 일대 개혁이라 불리며 이 때문에 종래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를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오면서 산스크리트어가 한자로 번역되고 한자 불경이 다시 우리나라까지 전해졌음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에게도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자은사(大慈恩寺)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7층 전탑인데 내부계단으로 올라가 볼 수 있다.
▲대자은사(大慈恩寺)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7층 전탑인데 내부계단으로 올라가 볼 수 있다.

현장 스님의 발원으로 세워진 대안탑(大雁塔)은 원래 50여m 높이의 오층탑이었으나 화재 등으로 인해 세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7층(64m) 탑은 17세기에 중수한 명나라의 유물이라고 한다. 탑의 1층 출입구 좌우 벽에는 652년 태종이 현장에게 하사한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고종의 ‘술삼장성기(述三藏聖記)’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두 비석에도 현장은 ‘삼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현장 스님의 모습, 현장삼장상(玄奘三藏像)

현장 스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현장삼장상(玄奘三藏像)’이다. 물론 상상한 모습일 텐데 등에는 경전을 가득 담은 대나무 책 상자를 짊어지고 불자(拂子)와 두루마리 경전을 양손에 들고 걷는 모습이다. 목에는 해골 목걸이를 걸었고 귀에는 금귀걸이가 있다. 이는 현장 스님이 입적 후 묻혔다는 흥교사(興敎寺)의 비석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일본에서 그린 그림으로 흥교사 비석 탑본과 비교해보면 이를 모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흥교사(興敎寺)의 현장 스님 비석, 현장법사상(玄奘三藏像)그림이 새겨져 있다. (사진 오른쪽)비석의 탑본, 시안 비림(碑林) 탑본작업장에 걸려 있었다.
▲(사진 왼쪽)흥교사(興敎寺)의 현장 스님 비석, 현장법사상(玄奘三藏像)그림이 새겨져 있다. (사진 오른쪽)비석의 탑본, 시안 비림(碑林) 탑본작업장에 걸려 있었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비단 채색화, 작자 미상으로 전해진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비단 채색화, 작자 미상으로 전해진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저술

1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현장 스님이 돌아본 나라만 해도 110개국이었다. 전해 들은 나라까지 치면 130개국도 넘는다고 한다. 거리로 따져도 5만 리, 2,000km가 넘는데 그러면서 보고 들은 숱한 이야기들, 각지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만나고 불교유적과 성지들을 돌아본 경험 등 현장 스님의 구법(求法) 행적을 정리한 기록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이다.

이는 현장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그가 체험하고 견문한 내용을 다른 승려인 변기(辯機)에 구술해 집필하도록 한 것이다. 승려 변기(辯機)는 왕의 칙령으로 현장의 경전 번역을 돕기 시작해 짧은 기간에 무려 4부의 경전 번역을 마칠 만큼 총명했지만, 황제의 유부녀 딸을 사랑한 죄로 극형에 처해졌다.

모두 12권의 대당서역기는 현장 스님의 사후 646년 7월에 완성되었는데 7세기 전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으로 현장 스님이 직간접으로 경험한 138개국의 기후, 풍토, 민족, 습관, 언어, 물산, 종교, 미술, 전설 등이 방대하게 담겨있어 당 태종 등 당나라 집권 세력에게도 아주 중요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불교문화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자료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법현의 ‘법현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3대 여행기로 손꼽히는데 이들 세 구법승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간 여행하고,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했던 인물이 바로 현장법사이다.


서유기(西遊記)의 탄생

현장법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하였다. 그 내용은 각색되어 희곡으로도 공연되었고 원대(元代)부터는 본격적으로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유기’이다. 애석하게도 원대 ‘서유기’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읽는 ‘서유기’는 명나라 말인 1570년경 오승은(吳承恩)이 ‘대당서역기’를 기초로 찬(讚)한 구어체 장편소설이다.

흥미롭기는 이 서유기 이야기의 장면이 국내의 불탑(佛塔)에도 남아있다는 것인데,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있는 경천사지 십 층 석탑(국보 제86호)과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 십 층 석탑(국보 제2호)의 기단부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조각들은 명나라 이전 원대(元代)의 서유기 장면인지라 더 희소성이 있다고 하니 한번 확인해 볼 일이지만 그 파손 상태가 심하다고 하니 걱정이다.


에필로그

현장 스님은 당(唐)나라의 고승일뿐만 아니라 뛰어난 불경 번역가이자 편찬 작업자이며 인류 문명사에 큰 획을 그은 여행가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당시에는 금지되었던 서행(西行) 길에 나서 인도까지 다녀오는 놀라운 실천력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심(佛心), 그리고 꼼꼼한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되살려낸 여행기록까지 어느 하나 칭송받지 않을 일이 없는 듯하다.

그리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역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훗날 중국의 3대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서유기의 모델이 되어 오늘날까지 고금의 수많은 삼장법사 대표 모델이 되었으니 비록 천 년도 넘은 훗날인 지금에도 그가 남긴 체온을 충분히 느낄 듯하다.

필자도 7~8년 전에 한 달 넘는 인도 배낭여행을 통하여 날란다 대학을 비롯하여 불교성지를 모두 돌아보았는데 당시 다섯 명이 냉방이 완비된 일제 도요타 승합차에 안내 겸 운전기사로 현지인을 1명 고용하여 다녔음에도 그 과정이 여간 힘들고 어렵지 않았는데 1,500년 전 그때 초라한 말 한 필에 의지한 채 다녔을 현장 스님의 구법(求法)여행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인류는 이런 선구자적이며 뛰어난 선각자, 학자, 종교가, 철학자, 정치가 등에 의하여 발전하고 보존되며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답사기를 마무리한다. 불과 며칠간의 다녀옴으로 중국 역사 속에서의 시안(西安)과 대표적 인물들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이렇게라도 정리함으로써 중국 시안여행 답사기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