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숍·쿡방·대여 서비스 뜨면, 디플레이션 징후래요

정부가 지난 16일 내놓은 내년 경제정책 방향에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덫에 갇혀 있다 보니, 그동안 걱정하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아니라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는 작년 12월 이후 올해 10월까지 11개월 연속 0%대를 기록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무슨 0%대냐면서 체감 물가는 훨씬 더 높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물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5년 이후 50년 만에 가장 긴 기간 동안 0%대를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또는 '일본형 장기 침체'로 빠져들고 있다고 일부 전문가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이처럼 물가상승률이 낮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장률도 2~3%밖에 안 되는 저성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디플레이션이란 무엇이고 왜 생기는 걸까요? 디플레이션에 빠져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또한 우리나라만 이렇게 물가가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는 걸까요?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들 가능성은 있을까요?

◇좋은 디플레이션과 나쁜 디플레이션

디플레이션(deflation)은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inflation)과는 반대로 물가가 전반적·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영어로 'deflate'가 원래 타이어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 오므라든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물가 하락은 통상 저성장과 실업 증가를 동반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에 요즘엔 디플레이션 하면 통상 물가 하락과 경기 침체가 동반하는 현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람 빠진 풍선이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물가 하락과 함께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는 상황을 상상하면 될 것입니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듭니다. 첫 번째는 생산성 및 기술이 급격하게 향상되는 경우입니다. 자동차, TV 등의 성능은 크게 좋아지고 있지만 가격은 제자리걸음 또는 내리기도 하는 걸 생각하면 됩니다. 'PC 가격이 떨어지는 걸 기다려서 사려면 죽을 때까지 못 산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과 같은 세계의 공장에서 값싼 상품을 쏟아낼 경우에도 이 상품들을 많이 사다 쓰는 나라는 물가 하락 압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수요 감소가 상당 기간 이어지면서 성장 체력 자체가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199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의 일본입니다. 1980년대 중후반 크게 부풀어 올랐던 일본 부동산과 주식시장에서의 거품이 동시에 터지면서 부동산 값과 주가가 급락했습니다. 동시에 성장률이 낮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덜 사면서 물가도 하락하거나 소폭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일본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된 것도 수요가 감소한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돈 쓰겠다는 생각이 경제를 어렵게 해

소비자 입장에선 물가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그리 나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월급으로 좀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돈을 빌려준 채권자의 입장에선 물가가 계속 하락한다는 것은 미래에 받을 돈의 구매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이 지속되면 기업 수익이 줄어들 것이고 그에 따라 고용도 임금도 부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이 내리다 못해 아예 실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파산하고 손을 드는 채무자가 늘어나면서 이자 조금 받으려다 원금을 떼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질 것입니다. 디플레이션은 한번 발생하면 이런 현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입니다. 소비위축→투자부진→고용악화→소득감소→수요부진→소비위축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풍속도를 한번 살펴볼까요. 일본의 다이이치생명보험이 매년 연말 직장인을 상대로 짤막한 시를 응모 받아 우수작을 선정하는데요. 1999년에는 '기분 좋게 100엔숍에서 과소비하기'가 선정되었습니다. 100엔이면 우리 돈으로 1000원 안팎인데 과소비라니, 그것도 기분 좋게라니요? 그만큼 살기 어려운 세태를 비꼰 것 아니겠습니까? 주부가 주고객층이었던 100엔숍에 최근 들어 직장인 남성들도 일회용 커피, 양말, 넥타이 등을 사기 위해 찾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TV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쿡방(요리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은 이미 일본에서는 경험한 현상입니다. 비싼 외식 대신 집에서 요리해서 먹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지요. 온라인 또는 휴대폰 주문 등을 통해 먹는 것과 입는 것들을 죄다 집에서 해결한다고 해서 '스고모리(すごもり·둥지 속) 소비'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소유하지 말고 만족하고 살자'면서 잠시 빌려 쓰거나 공유하는 트렌드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명품 목걸이나 구두 등을 빌려주는 대여 사이트가 인기를 얻고 있고 자동차뿐 아니라 집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쪼들린다고 해서 소비와 소유의 욕망을 억제하기보다는 대여 또는 공유를 통해 소비와 소유를 누리는 방식으로 소비 행태가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디플레이션에 대한 경계를 늦춰선 안 돼

물가가 하락 안정하는 흐름은 최근 주요 선진국들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미국이 선뜻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유럽이 추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겠다고 하는 것도 물가가 0% 안팎이면서 때로는 마이너스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거나 경기 부양에 소극적일 경우 자칫 일본과 같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깔려있지요. 따라서 앞으로 주요 선진국들은 물가를 어느 정도 끌어올리려는 '리플레이션(reflation) 전략'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경제 및 정책 여건이 다르기는 하지만 금리 인하 또는 양적 완화, 재정지출 또는 감세, 소비 관련 규제 완화와 같은 경기진작책으로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부추겨 수요를 늘림으로써 물가가 오름세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본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가 대표적인 리플레이션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도한 가계 부채, 고령화 및 저출산에 따른 경제활동 인구 비중의 감소, 비정규직의 증가, 기업들의 해외 진출 등에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과 엇비슷하게 가고 있습니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가운데 전자와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업종들이 주춤거리는 상황이 계속될 경우 디플레이션으로 진입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쿡방과 1000원샵은 물론 자동차와 가전제품의 대여 또는 리스가 등장하는 등 디플레이션의 징후도 이미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고 할 때 온다는 점에서 경계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