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어렵고 배고픈 사람 도와주소"

"다들 잘 있었나. 내 올해도 기부하러 왔데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남동 주민센터 직원들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 입구를 쳐다봤다. 작년까지 교남동에 살았던 기초생활수급자 권계란(86) 할머니였다. 권 할머니는 손에 든 흰색 봉투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100만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권 할머니의 기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작년 11월에도 미리 연락도 없이 주민센터를 찾아와 100만원을 건넸다. 평생 폐지 모으는 일을 하며 모은 돈과 한 달에 39만원 정도 받는 기초생활비를 모은 것이다. 직원들은 "형편도 어려우신데 마음만 받겠다"고 했지만 그는 "죽으면 누구 줄 사람도 없다. 좋은 일에 쓰겠다"고 했다. 종로구는 권 할머니의 기부금을 교남동 저소득층을 위한 '따뜻한 겨울나기' 지원 사업에 쓰기로 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권 할머니는 서울로 시집와서 작년 6월 옆동네로 이사하기 전까지 50년 가까이 교남동에서만 살았다. 주민센터 직원부터 동장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십년 전 남편과 이혼 후 자식들과도 소식이 끊기고 줄곧 혼자 살아왔다고 한다. 3평짜리 단칸방이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정부에서 지원하는 노인공동주택으로 옮겨가게 됐다. 그는 "적적할 때면 고향이나 다름없는 교남동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교남동 터줏대감 시절 권 할머니를 '목청 큰 민원인'으로 기억했다. 복지 담당이었던 한 직원은 "정부 지원 물품을 제대로 못 받거나 할 땐 어김없이 큰 소리로 호통치며 동장실로 직행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권 할머니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직원들한테 참 미안하고, 항상 고맙다"며 "나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작년 처음으로 100만원을 건네면서 "내가 여기서 받았던 만큼 더 어렵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세상 떠날 때까진 매년 기부할랍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