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24 09:48

▲집안의 열쇠들을 엽전에 꿰어 만든 조선 후기 열쇠패.
▲집안의 열쇠들을 엽전에 꿰어 만든 조선 후기 열쇠패.

자기가 쓴 글들을 모아 자비로 책을 내는 게 요즘은 흔한 일이 됐다. 더러는 ‘지적 사치’라며 곱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물심양면으로 공이 많이 들어가야 나오는 ‘또 하나의 자기’인 만큼 책을 선사 받으면 나는 정말 감사한 마음부터 든다. ‘사치’인지 ‘필수’인지는 내용을 충분히 읽어본 다음에 평가할 일이다. 글 쓰는 이들이 정말 바라기는 원고로만 갖고 있기엔 아까우니 필히 책으로 내야 한다며 출판사가 나서서 출간해주는 것일 게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필자는 자비로 책을 펴낸다. 흔히 500권 출간 기준으로 시는 3백만 원, 수필은 4백만 원, 소설은 5백만 원에 추천사 등 부수비용까지 1백만 원 정도는 더 생각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런 비용 부담 때문에 출간이 어려운 이들도 많다. 한 수필가가 그랬다. 글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가난한 그에게 책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수필 창작반에서 잠시 함께 공부한 안면밖엔 없던 사람이 비용은 물론이요, 멀리 지방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으며 수필집을 내줬다고 한다. 역시 같은 반이었던 지인에게서 이 얘기를 들으며 ‘돈을 참 잘 쓴 사람’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여유가 있다고 해도 이렇듯 남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수백만 원의 돈을 기꺼이 쓰기란 쉽지 않다.

체면이나 실리를 위해서라면 모를까, 남은 말할 것도 없고 풍족해도 친형제 간의 어려움마저 외면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돼서다. 형제 가운데 어떤 집은 형편이 어려워 자식들이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데, 다른 집은 해외유학에다 수시로 비싼 해외여행을 다닌다. 그래도 장학금 조의 돈 한번 건네는 법 없이 자기와 직계만을 위해 쓸 뿐이다.


어떻게 쓰자는 것인가

하기야 얼마 전 보도를 보면 가족에게조차 한 푼도 물려주기 싫다며 전 재산을 현금으로 바꿔 갈기갈기 찢었다는 오스트리아의 한 할머니 같은 분도 있다. 우리 돈으로 무려 11억 원이 넘는 돈을 찢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련만, 그렇다고 그 뜻대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찢어진 현금을 가족이 모두 새 돈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중년과 노년층 중에도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다 쓰고 죽자’며 ‘쓰죽회 회원’임을 농반진반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자는 것인가.

이미 그 씀씀이의 잠재력은 ‘뉴 실버’니, ‘골드 시니어’, ‘파워 그레이’ 같은 다양한 호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대대적인 쇼핑행사들은 어서어서 발휘하라며 잠재력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미국의 대규모 할인행사인 블랙프라이데이를 본뜬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가 전국의 2만여 매장에서 열렸고, 역대 최대 규모의 겨울세일인 ‘K-세일데이’가 이어졌다. 그 틈새에 오롯이 끼어있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을 안 사람은 얼마나 됐을까. 전 세계적으로, 또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지 오랜 날이라 건만 세일 광풍에 날아가 버린 듯싶었다.

20여 년 전 캐나다의 한 광고인은 ‘현대인은 죽으라고 일해서 죽으라고 사고, 죽으라고 버린다’며 자신이 만든 광고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에서 ‘Buy Nothing Day’를 만든다. 1년 중 11월 26일 단 하루만이라도 아무것도 사지 않고 우리의 소비행위를 되돌아보자는 날이다. 국제 환경단체와 사회운동가들이 환경오염과 과소비를 줄이자며 펼쳐오고 있다. 특히 노년층의 빈곤율과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가운데 가장 높은 우리로서는 나의 돈 씀씀이에 대해 더 깊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타적인 지출’

바로 돈과 행복과의 관계에 대해서다.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201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프린스턴대의 앵거스 디턴 교수는 연 소득이 우리 돈으로 8천만 원 중반을 넘으면 실제 느끼는 행복이 소득과 크게 상관이 없으며, 작은 즐거움을 즐기는 능력이 줄어드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의 마이클 노턴 교수를 비롯한 행동과학자들은 136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돈이 많고 적고가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놨다.

같은 금액이라도 자식의 대학등록금을 낼 때와 소년 소녀 가장에게 이를 지원해줄 때의 행복도가 달랐고, 모닝커피나 일상용품을 사려 했던 소소한 돈 또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썼을 때 행복도가 훨씬 증가했다는 것이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 기부한 적이 있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고도 한다. 이런 ‘이타적인 지출’이야말로 국가별, 개인별 소득의 많고 적음이나 부(富)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개인의 행복도와 직접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과였다.

전혀 모르는 이를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이타적인 지출은 듣는 것만으로 행복한 엔도르핀이 돌게 한다. 가난한 수필가의 책을 내준 이야기가 그랬다. 형제들이 형편껏 기금을 모아 어려운 친인척 자녀들에게 때때로 장학금을 준다는 어느 집안의 이야기도 그랬다. 듣고 행복할 것만이 아니다. 이참에 ‘Buy Nothing Day’를 되려 ‘Buy Something Day’로 삼아 뭔가 남을 위해 돈을 쓰는 날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연중 어느 날이건 내가 정하기 나름이다. 새해에도 시시때때로 불어올 세일 바람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돈이 돌게 하는데 한 손 보태고, 무엇보다 행복해지지 않을까.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