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만난 21세기 수묵화, 이진우

  • 글=황정원 시니어조선 편집장
  • 사진=양수열 C.영상미디어

입력 : 2015.12.31 10:47

조선일보미술관이 주목한 작가

아시아 현대미술이 부상하면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최근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단색화의 맥을 잇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이진우 화백을 미술평론가 윤진섭 교수가 만나 이야기 나누었다.

요즘 단색화는 그야말로 화단에서 ‘대세’로 통한다. 국내 유수 언론에서 단색화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단색화 특별전이 연이어 열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 돌풍의 핵에 미술평론가 윤진섭 교수가 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이자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한 그는 ‘단색화’라는 말의 탄생부터 부흥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함께한 사람이다. 단색화는 색을 제한하거나 형태를 단순화하는 것을 넘어 그 속에 작가의 철학과 몸성이 자연미와 함께 녹아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미니멀리즘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파리에서 만난 21세기 수묵화, 이진우
▲이진우 화백(사진 왼쪽)과 미술평론가 윤진섭 교수(사진 오른쪽).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이진우는 한국 단색화의 명맥을 잇는 작가로 주목받으면서 최근 무섭게 떠오르는 작가 중 하나다. 한지와 먹을 주 재료로 한 그의 작업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덮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정신인 겸양을 표현하고 있다. 대학 졸업 직후 파리로 날아가 정착한 이 화백은 1980년대 이후 파리를 비롯한 유럽, 중국, 한국 등을 꾸준히 오가며 전시와 개인작업을 해왔다. 아직까지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진 편이지만 2016년 가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를 준비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전시 기획에 즈음하여, 미술평론가 윤진섭이 이진우 화백을 만나 그간의 파리 생활과 작품 세계에 대해 인터뷰했다.

윤진섭 : 인생의 반 이상을 외국에서 살았는데, 처음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이진우 :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어요. 나 역시 파리에 에펠탑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었죠. 대학시절 계엄령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가 문을 닫았고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로 정신없이 4년을 지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떠났어요. 어떤 이는 미국으로, 어떤 이는 프랑스로. 저도 무작정 파리행을 택했지요. 갔더니 에펠탑도 있고, 루브르 박물관도 있고, 세계의 미술이 교류하는 예술의 중심지가 파리더군요.

윤진섭 : 그렇게 가서 무엇을 배웠나요?

이진우 :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어요. 일단 평가를 받아야겠기에 내가 석고상이나 모델을 놓고 그린 데생을 가지고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E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 Paris, 이하 보자르)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의 교수가 “이 데생은 유러피언 스타일이다. 너는 한국인인데 왜 유럽식으로 그림을 그렸니”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분은 가볍게 이야기했겠지만 저는 그 말을 듣고 총을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고 몇날 며칠, 아니 몇 년을 울며불며 괴로워했어요. 나는 한국인인데 왜 서양식 옷을 입고 서양 지식이 내 속에 들어와 있나, 내가 어쩌다 이리 기괴해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일같이 죽을 정도로 술을 마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서양미술을 공부함과 동시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증거를 찾기 시작했죠.

윤진섭 : 그때 충격을 받고 나서 한국의 미술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을 것 같아요. 아마 비판도 하고 반성도 했을 것 같은데.

이진우 : 당연히 비판을 많이 했지요. 보자르는 여러모로 한국과 많이 달라요. 당시 제가 청강생 자격으로 미술재료학을 공부했는데, 거기서 안료를 공부할 때면 화학자가 직접 와서 강의를 해요. 예를 들면 A라는 색깔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의 화학 방정식은 어떠하고 A가 다른 색과 섞일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며 건조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A의 특성상 기름을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다른 색깔과 중첩할 때는 이런 점을 감안해서 어떻게 사용하라, 하는 이야기를 화학자가 이야기해줘요. 아주 치밀하고 분석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거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교수가 와서 “야, 그게 뭐니” 하고는 당신의 붓으로 내 그림을 다 지웠어요. 

▲무제(Untitled), 140x100, 2015.
윤진섭 : 저도 한국에서 이론으로나마 미술을 가르쳐봤지만 시스템적으로 프랑스와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에요. 이 화백은 파리에서 여러모로 좋은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지요?

이진우 : 저도 그게 궁금해서 다 자란 뒤에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어요. “아버지, 내가 왜 그림을 그리죠? 우리 집안에 그런 내력이 있나요?” 하고. 그러자 아버지께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라고 하시는 거예요. “헤르만 헤세는 문학가인데요?” 했더니 그가 수채화도 곧잘 그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건축가이면서 그림에도 조예가 있으셨던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닌가 싶어요. 또 하나, 제가 세 살 정도 됐을 때 우리 집에 젊은 조각가가 세 들어 산 적이 있어요. 그분이 바로 국립현충원에 있는 무명용사비(한국전쟁 때 사망한 무명용사들을 위한 위령탑)를 조각한 최기원 선생입니다. 그 위령탑을 제작하던 시기에 홍익대학교 조교를 하면서 우리 집에 사셨어요. 그 선생님이 날 무릎에 앉혀놓고 크레파스로 그림을 가르쳐주시곤 하던 기억이 나요. 아무래도 세 살짜리 꼬마가 귀여웠겠지요. 때로는 그분이 위령탑 만들러 가실 때 저를 무등 태워서 작업 장소까지 데려가기도 했어요. 최 선생님이 돌을 쪼면서 조각할 때 저는 그 옆에서 하루 종일 놀았어요. 그때 그 아저씨를 따라다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매일 그림을 그렸으니 그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그리는 게 재미있었어요.

윤진섭 : 그렇게 어릴 때부터 그림에 조예가 있으신 부친과 조각계의 유명한 작가가 되신 최기원 선생을 만났으니 예술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셈이네요. 1983년도에 파리로 유학을 간 이후에는 보자르에서 만난 아브라함 핀카스(Abraham Pincas) 교수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은데, 그분과의 추억도 이야기해주세요.

이진우 : 아브라함 핀카스 교수는 유대인으로 20대 초반에 파리에 유학을 와서 27살에 보자르의 강사가 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분이에요. 제가 보자르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도 했고 이후 여러모로 아버지처럼 보살펴주신 스승입니다. 특히 공부가 끝날 무렵 교수님이 해주신 이야기는 제 미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자 추억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교수님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그가 “진우야, 너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니 선택해라.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뒤풀이를 다니며 인맥을 쌓을 것인지,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고 그림에 매진할 것인지.”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답이 딱 나오더라고요. 그곳은 파리였고, 저는 세계 미술계에서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는 한국 출신이에요. 작품으로 승부를 봐야 했죠. 교수님은 또 “앞으로 아시아 미술이 세계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중요한 전시를 몇 개 기획해서 열어주시기도 했어요. 특히 1989년에 열린 <아시아미술 4인전>은 잊지 못할 전시 중 하나입니다. 당시 작가가 인도인 2명과 중국인 1명, 그리고 저까지 해서 4명이었는데 그때 참여한 중국 작가가 그 유명한 첸젠(Chen Zhen)이에요. 그 전시를 계기로 그와 교류할 수 있었죠.

윤진섭 : 그렇다면, 핀카스 교수가 아시아 미술이 부상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미술 재료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한국적인 미술 재료에 대한 고민도 했나요?

이진우 : 당연하죠. 당시에 서양미술 재료를 공부하면서 ‘나는 한국인인데 우리 미술 재료는 전혀 모르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 미술은 서양미술 재료와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서양미술 재료를 선명하게 공부하고 나니 우리 미술 재료가 뚜렷이 구별되더군요. 우리 미술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게 지필묵입니다. 그래서 우리 미술 재료를 알기 위해 서양미술 재료를 공부하던 그 방법으로 분석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어요. 종이 만드는 법을 직접 배우기 위해 종이 생산자한테 가서 그걸 직접 만들어보고 생활하고, 또 그 종이를 연구하는 카이스트 임업 연구원의 박사님을 찾아가 그분이 연구한 컴퓨터 단층촬영과 논문 등을 살펴보고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종이 만드는 분들이랑 단짝처럼 친해져서 그분들이 파지가 나오면 저한테 몇천 장씩 주시더라고요. 홍수 때문에 종이에 얼룩이 지면 못 팔잖아요. 덕분에 저는 10년이고 20년이고 종이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었어요. 붓 만드는 법, 묵 만드는 법도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하루는 우연히 파리에서 소산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 전시에 갔는데, 거기서 나를 보시더니 그림을 그리시냐, 혹시 추사를 아시냐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알긴 알지만 잘은 모른다고 했더니 “한국 작가가 추사를 모르면 되나” 하시면서 그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주셨어요. 한국 작가니까 한국의 위대한 선배님들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그 길로 인연이 되어 그분의 작업실에도 가고, 선생님 댁에서 지내며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날 이후 매일 서예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매일 서예를 하는 것은 매일 된장찌개를 먹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이유예요. 한국 사람이면서 매일 햄버거 먹고 서양 노래 들으면서 서양 옷 입고 서양 철학 공부하면 서양화됩니다. 저는 매일 된장찌개 먹고 붓글씨를 쓰면 진정한 한국 사람이 제 안에 들어오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이론과 물질을 함께 공부하면서 지금도 작업하고 있어요.

▲ 무제(Untitled), 59x168, 2014
▲무제(Untitled), 59x168, 2014
 윤진섭 : 이 화백 작품을 보면 한국 단색화 1세대 작가들의 특징을 찾을 수 있어요. 파지를 받아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한지를 바르고 쓰고 바르는 작업을 반복하잖아요. 단색화의 특징은 수행성, 정신성, 반복성이거든요.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물성이 생기면서 ‘몸성’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차별화되는 점이고, 그걸 세계에서 인정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진우 : 바로 그거예요. 올해 파리에서 제 전시에 대해 소개한 책자의 서문에 보면 ‘나는 머리 없는 작가다’라는 표현이 있어요. 저는 작업실에 갈 때 머리를 떼어놓고 몸만 갑니다. 그래서 내 속에 내재된 것을 수없는 반복의 노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하는 거죠. 개념이나 생각으로 계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극심한 노동을 반복해야만 제 속에 있는 ‘무엇’이 나올 것이라는 거죠. 내 몸에 들어 있는 된장찌개 냄새나 김치가 생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을 많이 퍼내면 맑은 물이 나오듯이, 제 속에서 그런 맑은 물이 나왔으면 하는 염원으로 퍼내고 또 퍼냅니다. 또 하나는 서양미술이 남들에게 보여주는 비주얼 아트라고 한다면 동양미술은 그것을 안으로 감추는 것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뭔가 작업을 하고 종이로 덮은 거예요. 부끄러운 마음, 죄송한 마음으로. 내 이웃에게 감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겸양의 마음으로 종이를 붙이고 또 붙이고 했어요. 이제는 단순노동이 재밌어졌어요. 하루 종일 종이를 붙이고 또 붙이고 손으로 갈다보니 집에를 못 갈 정도로 재밌어요. 그러다가 손이 마비돼서 수술을 하는 지경까지 갔죠. 중단이 안 되니까.

윤진섭 : 바로 그런 데서 ‘몸성’이 드러나는 거죠. ‘몸이 말한다’ ‘예술가가 무언가를 반복해서 얻는다’ 하는 게 스님들이 선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과 비슷한 경지 같기도 합니다. 또 이화백은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죠? “예술은 인간을 넘어서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고귀한 것이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이진우 : 제가 서양에 공부하러 간 1980년대 말의 미술은 굉장히 도도하고 군림하고 권위적인 예술이었어요. 말하자면 미술이란 일반대중과 격리된 것이고, 예술이란 것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대 만지면 안되는 존재로 여겨졌어요. 미술가나 예술가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게 미술은 즐거움이었고 행복이었거든요. 특히나 우리 동양미술에서는 미술이란 것이 숭배의 차원이 아니라 대중에게 순기능을 하는 존재예요.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노동자이고 예술은 인간들이 작품을 보면서 "오, 나는 저걸 보면서 참 기쁘네!" 라는 자기 존재성을 깨닫게 해주는 매개체에 불과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보다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는 작품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거죠.

윤진섭 : 요즘 추세가 예술과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예술이 있고 예술 속에 생활이 있다’ 하는 건데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선생은 평소에 먹던 씨앗 같은 것도 뱉어내서 키우면서 작업에 활용한다는데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이진우 : 예전에 진짜 배고플때 콩을 많이 삶아 먹었어요. 완전 식품이니까요. 근데 콩을 삶아먹으려면 12시간 이상 불려야되거든요. 어느 날 식사 초대를 받아서 외식을 하느라 며칠 동안 콩을 그대로 물에 담가놓고 안 먹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 글쎄 그 사이에 콩에서 조그만 연두색 싹이 난 거예요. 그때 제가 정말 외롭고 배고프고, 전깃불도 없이 파리의 어두컴컴한 작업실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내가 먹는 양식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어요. 결국 그 싹이 난 콩은 못먹었어요. 그대로 놔뒀더니 싹이 계속 올라오더군요. 그래서 그걸 1년간 바라보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이것저것 씨를 주워다가 물을 뿌리면서 자라나는 걸 보며 글도 많이 쓰고 그 과정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씨에서 싹이 나오면 그걸 그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덮어서 또 그리고 또 덮고 그랬지요. 그때 밥 해먹으려고 나무를 주워서 불을 때고 남은 숯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그러던 것이 지금의 작업과 연결된 겁니다.

▲ 파리에 있는 이진우 화백의 작업실 풍경.
▲파리에 있는 이진우 화백의 작업실 풍경.
 윤진섭 : 지중해 갔을 때 섬에서 화산이 터져서 그 화산재를 주워서 작업하기도 했다면서요?

이진우 : 제가 파리 대학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데 군대에서 통지가 왔어요. 입대를 연기하려면 지도 교수님 편지가 있어야 해서 수소문했더니 교수님이 스트롬볼리라는 섬으로 휴가를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로마로 가서 로마에서 다시 시실리로 가서 기차를 타고 어느 항구에 가서 배를 타고 어렵게 어렵게 그 섬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교수님을 찾아가니 그분이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면서 “너 어떻게 알고 왔니?” 그러시는 거예요. 알고보니 제가 막 도착한 시점부터 그 섬에 있는 화산이 폭발을 시작했더라고요. 화산 폭발 소식을 듣고 그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헬기를 타고 온 독일 기자들이었는데, 그들과 거의 동시에 제가 도착한 거예요.

윤진섭 : 그럼 그 현장을 봤겠네요.

이진우 : 그때 교수님이 담요 한꾸러미랑 레몬 두 조각을 넣은 물 한병을 주면서 “이건 일생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니 화산섬으로 올라가라”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화산으로 올라갔어요. 산 정상에 갔더니 정말 독일 기자 두 명만 있더군요. 그때 화산 분출구에서 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서 폭발 장면을 보았죠. 정말 화산이 어마어마하게 터지는데,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화산재가 온몸을 뒤덮었어요. 그때 양말에 담아 온 화산재로 작업을 했어요. 교수님이 준 담요를 덮고 누워서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를 듣는데,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지중해 파란 바다에는 별빛이 비치고… 그 광경을 밤새도록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까 전 세계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산을 뒤덮었더라고요. 물론 저랑 독일기자들이 제일 좋은 자리에 있었지요.

윤진섭 : 이 화백 작품을 보면 전통을 현대화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도 엿볼 수 있어요.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세요.

이진우 : 어떤 분이 제 그림을 21세기 수묵화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제 작품이 뛰어나고 우쭐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끌어안아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빈 집에, 빈 마당에 제 작품이 걸려 있을 때 거기에 우리 조상의 위대한 유산인 한지가 붙어 있어서 거기서 우리가 늘 편하게 생각하는 무언가를 느꼈으면 해요. 어릴 때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 느낀 편안함,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위로받는 것 같은 편안함을 제 그림이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윤진섭 : 끝으로 2016년의 계획을 이야기해주세요. 그리고 계속 파리에서 활동할 것인지, 한국에서 활동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이진우 : 미술 작업은 계속 파리에서 하게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파리에서는 제가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으로 일할 수 있거든요.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이면서도 동시에 외로운 섬 같아서 그 속에서 철저히 고립될 수 있어요. 2016년에는 미술 쪽에서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화집을 발간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가을에는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리고요. 전시는 아마도 지금처럼 유럽과 중국, 한국을 두루 오가며 하지 않을까요. 특히 한국은 모국이다보니 어머니 품에서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언제든 들어오면 안아주는 내 나라. 올가을 개인전을 통해 모국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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