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화된 커피숍. 솔직히 이야기하여 젊은이들이 가는 커피숍에 가게 되면, 우리 노인들은 이름을 몰라 당황하게 되는 일이 있다. 더욱이 요사이는 책과 함께 어우러지는 북카페가 많아 노인들을 주눅이 들게 한다. 옛날, 나지막한 의자에 푹신하게 들어앉아 마시던 다방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고, 마음대로 떠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 이름도 괴이한(?) 각양각색의 커피맛을 알 길도 없다. 옛 재래 다방 같으면 ‘커피요!’ 한마디면 충분한데, 커피 전문점 메뉴판에는 ‘아메리카노’ 로부터 시작해서 생소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요사이는 음식점, 커피 전문점들이 시골 산골짜기에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몇 년 전, 진천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길, 그 옛 배티고개 밑에 ‘산골짜기 카페’란 곳에 들어가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커피 메뉴에 ‘양촌리 커피’ 라는 이상한 이름이 하나 눈에 띄었다. 다른 커피와 마찬가지로 가격이 4,000원이었다. 양촌리로 봐서는 시골 동네 이름인데,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주인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지만, 빙그레 웃으면서, ‘한 번 드셔 보셔요!‘ 하는 게 아닌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행의 눈이 꽂힌 그곳, 주인의 손에 들려진 쟁반에는 노란 양은대접이 일행의 수대로 놓여 있었다. 식혜나 가벼운 국산 차를 특색있게 저 그릇에 먼저 내어주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자리에 놓인 것은 찌그러진 양재기, 그리고 담긴 것은 틀림없는 커피였다.
‘아니, 이 건….’
양촌리, 그렇다. 배우 최불암, 김혜자 씨가 나왔던 ‘전원일기’의 고장이 바로 양촌리 아니던가? 바로 일용이 엄마가 부엌에서 타 내 오던 그 커피가 맞다. 우리 일행은 기분 좋게 배부르게 커피를 마시고, 껄껄껄 웃음을 웃으며 그곳을 나왔다.
그런데 요새 노인복지관에서 독거노인을 찾아 도와주는 생활도우미들의 수기집을 내는데 도와주기 위하여 읽어 가던 중, 그 양재기 커피 이야기를 또 대하게 되어 옛 양촌리 커피 생각에 빙그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활지도사가 농촌 독거 어르신 댁에 가면 이 양재기 커피를 마시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묽게 타서 한 대접을 갖다 놓으면 할머니 앞에서 무어라 내색도 할 수 없이 난감해지기도 하지만 그 정이 한가득 담겨있는 묽은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노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커피를 처음 대한 것은 필시 6·25 전쟁 전이었다. 그때는 미국으로부터 구호물자를 받았던 때인데, 시레이션 박스 속에 반짝반짝하는 작은 포장지가 둘씩 들어 있었다. 한 개는 하얀 설탕인데, 또 한 개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다. 씁쓰름한 게 맛도 고약했지만, 그런대로 맛을 보았다. 입에 대고 쭉쭉 빨아 먹기도 하였다. 우리 남매들은 입가가 새까매져서 서로 보고 손가락질하며 웃은 일이 생각난다. 그 당시에는 ‘그 쓴 것을 누가 먹는단 말인가?’ 했다. 그 후, 술 마시면 으레 뒤풀이 식으로 다방에 들리게 되고, 이야기꽃 속에 꽃술처럼 자리 잡는 게 커피였다.
이제는 길거리 판매대에서 빼 먹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난 후, 마음대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한 시설이나, 믹스 커피 덕분이다. 그리 마시다 보니, 하루에 몇 잔까지 마시는 게 몸에 좋으니, 무슨 커피를 마시는 게 좋으니, 행복한 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다 설탕이나 크림을 빼느니 넣느니, 그 간단한 커피 한 잔 먹는 데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먹거리나 마실 거리에 대해서 온종일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서 방송하고 있으니, 현대인들의 먹거리 마실 거리에도 호불호를 따지는 일이 많아졌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알아보니, 커피가 중독되는 것은 틀림없으나, 우울증, 통풍, 당뇨병을 예방할 수 있고, 기억력도 향상한다고 한다. 물론 설탕이나 크림을 제한 커피가 더 효율적이라고 하는데, 달디 단 믹스 커피에 길들어 있는 터에, 옛 어릴 때 생각이 나는 그 쓰디쓴 커피를 잘 마시게 될는지 모르겠다. 모든 면에 서양 문화가 들어 왔지만, 식사 후에 마시던 숭늉이나 보리차, 결명자차, 또 명절 때면 마시던 식혜를 제쳐놓고, 으레 마시게 되는 이 커피야말로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음료 서열 윗자리에서 감 놓아라 배 놓으라 하고 있는 듯하다.
언뜻 중학교 때 배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에 나오는 ‘갓 볶아낸 커피 향’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그렇게 멋스러워 보이는 향은 어떤 향일까? 낙엽 태우는 냄새와 가장 가까운 커피를 찾아 마시며, 이효석의 수필을 음미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