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만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다음날 5시쯤이면 눈이 떠진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전형적인 ‘새 나라의 어린이’다. 잠들기가 쉽지 않다는 친구에게는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문제는 중간에 깰 경우다. 일어날 때가 머잖은 새벽 3시쯤 눈이 떠지기라도 하면 당최 다시 감아지질 않는다. 어떻게든 자봐야지 하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노라면 머릿속도 함께 뒤척여진다.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느끼게 되는 시간이다. 지난 일들, 그것도 하필 후회스런 일들만 생각나니 말이다.
‘아니야, 그 때는 그 게 최선이었어.’ 내심 결론은 늘 이렇게 나곤 했었는데, 어제 새벽녘에는 달랐다. 전날 FM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 한 대목이 인상 깊게 남아있어서였을까.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하데스가 지배하는 영혼의 세계로 가자면 건너야하는 강이 있다고 한다. 망각의 의미를 갖는 레테를 비롯해 슬픔과 탄식, 증오와 불을 각기 상징하는 5개의 강이다. 한 모금씩 마시고 건너게 되는 레테의 강물은 과거의 모든 기억과 번뇌를 깨끗이 지워준다.
한 여인이 레테의 강가에 서있다. 배를 저어 다가온 뱃사공은 여인을 태우자 물병을 건넨다. ‘이 물을 마시면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슬픔과 괴로움을 다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기쁨과 사랑의 기억도 다 사라져버린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물을 마실지 안 마실지 결정해야 한다.’ 뱃사공의 말에 여인은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마시지 않겠다며 물병을 되돌려줬다. 기쁨과 사랑의 무게는 슬픔과 괴로움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모자이크 그림
이야기를 들으며 지나간 내 삶에서 내가 빠져나와 그 삶을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느꼈다. 그렇구나. 지나간 삶의 기억은 후회한다든가, 최선이었다든가 재고 가르는 게 아니구나. 여인이 강물을 마시지 않고 레테의 강을 건넜듯이 희로애락의 기억은 모두 함께 나와 가는 것이로구나. 자책이나 합리화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사진처럼 기억의 앨범에 넣는 것이로구나. 어떤 기억의 조각일지라도 빠지면 그려질 수 없는, 삶은 ‘모자이크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밑에 갖는 모임을 ‘망년회’라기보다 ‘송년회’라 부르고 싶어진다. 망년회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식 표현이기도 하지만, 잊을 망(忘)을 쓰니 레테의 강물을 마시는 셈이지 않은가. 보낼 송(送)을 쓰는 송년회가 한 해를 정리해서 기억의 앨범에 넣어 두기에 더 적당한 말인 것 같다. 앨범을 덮은 후에는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 이메일을 사용할 때 보면 ‘받은 편지함’, ‘보낸 편지함’, ‘예약편지함’ 등과 더불어 ‘내게 쓴 편지함’도 있듯이 컴퓨터로든 종이로든 내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이맘때 ‘마지막 10년 맞을 나에게 쓰는 편지’를 썼다. 1935년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여든을 기해 당신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늘 ‘앙금 없는 포도주처럼 늙고 싶다’던 그분은 편지에 다음 3가지 소망을 적었다. 마지막 시기에 남의 눈치를 보며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 맺힌 것을 풀자. 그건 내가 나를 용서함이다. 나누면서 살자. 이 세상에 나온 것부터가 ‘빚’이고, 빚을 갚는 일은 곧 나눔이다.
1년 후에 받는 편지, 우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