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2.31 15:09

스치는 곳마다 총탄 자국이 선명했던 눈물의 보스니아를 뒤로하고 라벤더의 천국 흐바르 섬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어제 늦은 밤, 크로아티아의 작은 항구도시 드르베닉에 도착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니 아드리아해가 코앞이다. 아침 식사 전에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보석 같은 맑은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애들처럼 좋아라 아침 산책을 즐긴 다음 그림 같은 작은 항구도시 드르베닉을 떠났다.

약 1시간 30분여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를 타고 도착한 흐바르 섬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 장의 엽서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나도 풍경이 되고 엽서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흐바르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베네치아 요새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보이는 것은 라벤더들이었다. 보랏빛 꽃이 한창일 때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이름 모를 노랗고 하얀색의 작은 들꽃들이 앙증맞은 모습으로 나를 위로한다. 간간이 포도나무들도 보이지만 과연 여기가 세계적인 명품 적포도주를 생산하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흐바르 섬 전경.
▲흐바르 섬 전경.

흐바르 섬의 중심 스테판 광장을 걸어 본다. 세계적인 부호들, 영국 왕실,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빌 게이츠가 생전에 여름이면 즐겨 찾는다는 도시답게 차분하고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연어 빛을 띠는 붉은 지붕과 하얀 대리석 건물들. 짙푸른 바다에 한가롭게 떠 있는 하얀 요트들이 마법 같은 풍경을 그려내는 달마티안 해안의 중세 마을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개 달마티안의 고향이다. 그러나 여행하는 내내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마을 북쪽 언덕의 포르티차(Fortica) 요새에 올라 항구와 섬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흐바르 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가 스테판 광장으로 내려왔다. 아드리해의 일렁이는 바람결 따라 걷다가 노천카페에 들렀다. 빛바랜 황금빛 곱슬머리 청년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온다. 그냥 다가왔어도 홀렸을 텐데 춤까지 추며 아리아를 부르며 다가온다. 꼭 영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홀렸다. 노랫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라도 그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홀린 듯 평소엔 먹지도 않는 맥주를 시켜 놓고 광장을 둘러본다.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까지 감도는 이 광장에서 지나간 여름의 흔적을 찾아본다.

6~7월에는 라벤더가 지천으로 피는 덕분에 꽃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섬이라지만 흐바르 섬의 진가는 여름에 찾아온다고 한다. 여름 휴가철에는 섬 전체가 파티장으로 변모해 그 정열적인 분위기를 따라 가수 비욘세나 영국의 해리 왕자도 흐바르 섬에서 여름 파티를 즐긴다니 얼마나 흥청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세계 유명인들을 길에서 스치길 바란다면 이 섬으로 올 일이다.

크로아티아에서 진짜 매력을 느끼려면 섬 여행이란다. 크로아티아에는 1,244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고 그중에서도 꼭 들러야 할 섬을 꼽는다면 바로 흐바르 섬이라는데 꽃 누나에서 왜 이곳을 놓쳤을까 궁금하다. 흐바르 섬은 동서로 80㎞로 길게 이어진 에메랄드빛 바다를 끼고 형성된 섬이다. 바다와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기후는 온화하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곳이라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래된 구시가지의 골목마다에 자리 잡은 예쁜 상점들이 여행자를 잡아끈다.

골목길을 걷다가 예쁜 상점들을 들여다보다가 스테판 대성당이 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여행자의 여유를 맘껏 누려 본다. CF나 영화 속에서나 보던 돌바닥 위의 노천카페에 앉아 레몬 맥주를 마시는 것도 꿈결 같은데 성당의 종소리까지 들려온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종소리인가. 내 고향 성당의 종소리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곳 스테판 성당에 머물고 있었나 보다. 종소리도 내가 찾아온 것이 반가워 저리도 맑고 투명하게 부르는데 화답이라도 하듯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따라 스테판 성당으로 향했다.

1520년 만들어졌다는 우물을 지나 크로버 문양이 돋보이는 성 스테판 대성당 꼭대기에 크림색 종탑이 눈부신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어느덧 꿈결같이 울리던 종소리도 사라지고 여행자만이 멍한 눈빛으로 서 있다. 들리는 소리로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종을 친단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성당의 종소리는 내게 먼 추억을 불러다 주었다.

고향의 성당에서 하루 세 번씩 울리던 종소리는 내 유년 시절의 가장 큰 울림이었다. 어느 해, 고향에 내려갔을 때 더 이상 그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시끄럽다는 소리에 중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에 낙심했던 그 마음을 이 먼 흐바르 섬에서 위로를 받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어느 나라 사람은 그것을 보존하고 우린 시끄럽다고 그것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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