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물하는 이 기분, 아시나요?"

대전에 사는 홍순자(81)씨는 1992년 8월 "아들이 뇌출혈로 쓰러져 뇌사에 빠졌다"는 전화를 받고 주저앉았다. 군부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홍씨의 막내 아들 양희찬(당시 22세) 상병은 부산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다 2년 전 입대한 터였다.

아들이 입원한 경남의 군(軍)병원으로 달려간 홍씨는 "양 상병의 평소 뜻에 따라 장기 기증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생때같은 자식 보내는 것도 억울한데 어떻게 몸에 칼을 대느냐"며 홍씨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나는 죽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요."

아들 얼굴을 바라보며 밤을 새운 홍씨는 이튿날 아침 군의관에게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양 상병은 간장, 췌장, 신장 2개, 각막 2개, 폐장의 기능이 살아 있었다. 그길로 헬기에 실린 양 상병은 서울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 죽음의 문턱에서 장기이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환자 5명이 새 생명을 얻었다.

'도너 패밀리(Donor Family·뇌사 장기 기증인 유가족)'가 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양 상병 가족 3명은 근년 들어 장기를 기증하거나 사후(死後) 기증을 약속했다. 홍씨는 아들 뜻을 이어 지난해 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을 했다. 홍씨의 손녀 강은희(41)씨도 지난해 7월 사후 장기 기증에 서명했다. 양 상병의 형수 정순자(51)씨는 지난 2004년 신장 하나를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이식해줬다.

이들은 양 상병 덕분에 가족 여럿이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장기 기증에 나섰다. 양 상병의 형 양희만(57)씨와 누나 양희분(59)·양희덕(61)씨가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차례로 누군가에게서 신장을 이식받은 것이다. 가족 중 장기 기증자가 있으면 장기이식을 받을 때 우선순위에 오른다.

양 상병 둘째 누나 희분씨는 2014년 10월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6년 전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고 복막투석을 받아오다 그해 들어 병세가 악화해 장기이식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됐다. 뇌사자로부터 신장을 이식받기까지 평균 대기 기간은 5년(2014년 기준). 병원은 희분씨 동생 양 상병이 과거 뇌사 장기 기증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3개월 만에 뇌사 기증자를 찾은 것이다.

큰누나 희덕씨도 지난해 7월 신청 1년 4개월 만에 신장을 이식받았다. 희덕씨는 "2년 6개월을 꼬박 신장 투석으로 고생하다가 이제 몸이 좋아지고 외출도 하니 내 동생 희찬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체감한다"고 했다.

양 상병 셋째 형 희만씨는 지난 2004년 신장을 이식받아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희만씨의 아내이자 양 상병의 형수인 정순자씨는 남편이 수술받고 3개월 뒤 자신의 신장 한쪽을 기증했다. 정씨는 "남편도 새 생명을 얻었고 하늘에 있는 도련님(양 상병)에게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도 신장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양 상병이 장기 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일이 화제가 돼 장기 기증을 결심한 뇌사자 가족들도 늘고 있다. 1991년 2명에 불과했던 뇌사 장기 기증자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 1999년엔 162명이 됐다. 2000년엔 뇌사자 장기 기증에 관한 법률이 마련됐다. 양 상병처럼 누군가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간 기증자는 장기 기증이 법제화된 2000년 이후 최근까지 3000명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