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꿈을 꾼다. 가방을 싸고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따라 걷고 싶은…. 그래서 바쁜 일상 속에서 홀연히 떠나 낯선 땅, 낯선 사람, 낯선 동·식물과 마주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상상은 언젠가는 가고 싶은 곳이라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막연한 꿈을 꾼다. 그 꿈이 정글 속 연예인들의 예능프로그램 '정글의 법칙'(SBS)이나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나오는 나영석 PD의 '꽃보다' 시리즈가 나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으며 꿈들을 부추겼다.
바로 내가 그랬다. 유럽은 인제 그만 했는데 ‘꽃보다 누나’에 나오는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를 보며 ‘저기엔 꼭 가야지’ 하는 꿈을 꾸게 하였다. ‘그래 아직 발칸반도에 가지는 않았었지. 안 갔으면 가야 해. 그곳에 무엇이 있고, 누가 사는지 내 눈으로 보고 듣고 싶어.’
가고 싶다고 성큼 나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이곳저곳 기웃대 보아도 동유럽을 거치는 크로티아행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녀온 곳을 또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돌아서기를 여러 번.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발칸반도를 도는 여행이 눈에 들어왔고 친구 넷이 떠났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크로아티아의 영광'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가지고 있는 곳은 어딜까. 바로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이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총 16개의 크고 작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면적이 서울시 절반 크기 정도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규모의 세계적인 국립공원이다. 1979년 유럽에서 두 번째로 국립공원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으며 영화 아바타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전날, 로마 황제가 사랑한 도시 ‘스플리트’의 광장에 서 있던 그레고리우스 닌의 발가락을 만지고 돌아섰던 탓일까. 행운은 또다시 따라와 주었다. 우리보다 앞서 다녀갔던 팀들이 가뭄이 든 탓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단다. 우리 전 팀은 비가 많이 내린 탓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공원 내에 홍수가 나서 공원 입구의 폭포 한 곳을 보고는 돌아섰다는데 우리 팀은 공원 깊숙이 들어가 제대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비경을 볼 수 있었으니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날씨는 어제처럼 화창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이런 날씨가 발칸반도에서는 흔하지 않은 날씨란다. 햇살이 쏟아지는 숲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다. 발밑에 수북이 쌓여있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가 내려가니 폭포가 눈에 들어 왔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위쪽에 있는 상부 폭포다. TV에서 사진에서 흔히 보았던 그 풍경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입을 다물 수가 없는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다른 모습의 폭포들이 줄지어 나타나 ‘우와’ 함성을 지르다가 다시 “우우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감탄사란 감탄사는 다 쏟아 냈다. 아마 폭포가 저 혼자만 흘렀다면 그렇게 함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폭포 주변에 거센 물살을 받아내는 초록빛 이끼라던가, 부서져 하얗게 튀는 물방울, 흘러가며 거세게 휘몰아치는 물살을 꿋꿋이 이겨내고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물가의 풀들 덕분에 폭포가 더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폭포와 호수에 취해 물안개 속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나도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이 폭포에서 또 다른 폭포로 가는 길은 물이 흐르는 늪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판자 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 판자 길에 빠른 물살이 찰랑거리며 흘러가니 가끔은 발을 내딛기가 겁나는 곳도 있었으니 전 팀이 들어오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작은 선착장에 도착했다. 100여 명 탈 수 있는 배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 했다. 일행의 뒤쪽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경치에 눈이 팔려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가이드와 중국사람 몇이서 배에 승선시키는 사람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중국 사람은 중국말로, 가이드는 영어로, 앞 선 우리 일행 중 한 명은 우리말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무슨 일인가 하여 다가가니 아뿔싸 배에 탈 수 없단다. 정원이 찼다는 이야기다. 다음 배는 두 시간 후에나 운행된다니 배에 탄 사람이나 못 탄 사람이나 황당한 사태다. 승선 관리인의 완강한 거부에 결국 우리는 타지 못했다. 가이드와 우리 일행 다섯은 망연자실 하는 사이 침착한 가이드가 배에 대고 소리친다.
“내리거든 계단 위에 올라가 기다리세요.”
지은 죄도 없이 가이드 눈치를 보게 되었다. 꼭 늦장 부리다 못 탄 것만 같아서 눈치를 보는데 걸어가잔다. 걷는 것 좋아하는 나로서야 이게 웬 횡재인가 싶지만, 것도 잠시 가이드 표정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가이드도 처음 당하는 터라 길을 모른다는 뜻일 게다. 가이드 걸음은 빨라지는데 눈치도 없이 계단 있는 곳까지 가려면 몇 분이나 걸리느냐고 옆의 친구가 자꾸 묻는다. 묻지 말라고 옆구리를 찔러도 소용이 없다. 궁금해 묻는 친구에게 가이드는 대답이 없이 걷기 시작한다. 친구는 또 묻는다. 그래도 대답도 없던 가이드가 갈림길 저쪽으로 사라져 가는 서양인을 향해 뛰어간다. 아마도 길을 묻는 모양일 테지.
자연 그대로의 나무가 늘어선 길을 걸었다. 낙엽은 발목까지 푹푹 빠질 만큼 길 양옆으로 쌓인 길을 걸었다. 모두 기분 나빠야 하는데 난감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두 이런 행운이 온 것에 대해 감사했다. 일부러 낙엽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팔을 뻗어 들고 파란 하늘을 보며 걷기도 하고.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가 이 ‘플리트비체’의 숲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다시 또 이곳에 온다 해도 이 길은 걸을 수 없는 길이었기에 더 행복했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시(詩).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이다. 플리트비체의 숲길을 걸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다면 바라보기만 하고 절대로 걷지 못했을 길이었다. 걸으며 바라보며 스쳐 가는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길로 남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런 뜻하지 않은 일은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 뜻하지 않은 일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행한 기억으로 남길 것인지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 갔다 온 다음 이 이야기를 어떤 자리에서 했더니 어떤 분 왈 그런 걸 가만있었느냐고? 항의해야지 따져야지 했다. 나는 지금도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