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1.13 09:58

‘재물:보통 건강:보통 사랑:베풂 길방:西 기쁨도, 슬픔도 지나면 모두 추억. 대인배의 마음을 가져야. 길이 아니면 가지 말 것.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수용할 것. 음양의 조화가 잘 이뤄져야. 정보수집에 공 들일 것. 도전하지 말고 복지부동.’

신문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오늘 나의 운세다. ‘실물분실 사기 보증 등에 주의해야 손해가 적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평평한 운이니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면 별일이 없는 평범한 한해 일 것이다.’ 인터넷에 나온 나의 신년 운세다.

이상하다. 여태껏 어디 가서 돈 내고 운세를 점쳐본 적은 한 번도 없건만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는 놓치는 법이 없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동터올 무렵 컴퓨터를 열기만 하면 보이는 새해 띠별 운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의해야 손해가 적고,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면 별일이 없다니, 이거야 뭐 보나마나한 운세 아닌가. 그럼에도 마치 외국에 들어설 때 여권에 스탬프를 찍듯 하루와 한해에 들어서며 운세에 눈도장을 찍는 것이다. 물론 이유는 단 하나, 운이 좋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 새겨져 있는 용의 얼굴 형상. 문 밖의 액운을 말아 먹고자 긴 혀를 내밀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 새겨져 있는 용의 얼굴 형상. 문 밖의 액운을 말아 먹고자 긴 혀를 내밀고 있다.
지난 가을 잘 익은 감 하나가 바로 내 발 앞에 툭 떨어진 것 같이 말이다. 그렇게 떨어지면 터져서 뭉개지기 마련인데 놀랍게도 그 감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했다. 바람 없는 화창한 날, 익을 대로 익어 이제 막 떨어질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감, 절묘하게 내려앉기 몇 초전에 감나무 밑인 줄도 모르고 걸어가던 나. 한 발만 더 갔어도 감을 밟거나 지나쳤을 테고, 덜 갔으면 감은 다른 이의 눈에 띄었을 텐데 모든 박자가 완벽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작은 기적이랄까, 운에 환호하며 아이 주먹만 한 감을 집으로 모셔와 사진까지 찍어뒀다.


운은 움직인다

그 감처럼 운이 어디선가 내게 절로 굴러들어오길 바라기에 신문이나 인터넷의 한두 줄이나마 운세에 시선을 박는가 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게 운이란 생각에서다. 요즘 모바일 SNS에서 떠도는 젊은이들의 ‘수저론’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영어 숙어인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에서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상징된 은수저가 수저론에 이르러서는 금, 동, 놋, 플라스틱에다 심지어 다이아몬드와 흙(묻은) 수저로까지 세분화되며 계층을 가르고 있는 판이다.

다이아몬드수저는 재벌 2,3세쯤 되는 듯하고, 금수저는 부모 자산 20억 원 이상, 또는 가구 연수입 2억 원 이상으로 총인구의 상위 1%층이라고 한다. 반면 흙수저는 대학 입학 후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거나 부모 자산 5000만 원 이하, 가구 연수입 2000만 원 이하란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저를 바꿔 물 수 없는데, 기성세대와 사회는 노력만 강조한다며 ‘노오력’으로 길게 발음해 비꼬는 소리도 들린다. “운 나쁘게 재산도 지위도 별 볼일 없는 집에 태어났다”는 자식의 원망인 양 들리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 운명은 타고 난다. 하지만 운은 움직인다고 운명학 명강사 이정일 씨는 말한다. 주역과 명리학, 관상, 수비학, 현대 점성학에다 과학적 데이터까지 구축해 기업과 CEO에게 운을 컨설팅한다는 그는 자신의 운명을 행운으로, 또 불운으로 만드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신의 습관에 있다고 본다. 누구나 평생을 부유하게 살만한 재복을 타고나건만 불운을 만드는 습관 탓에 이를 다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3만5000명의 운명 데이터를 검토해 보니 운을 제대로 쓴 사람은 0.1% 미만이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은 남들과의 지나친 경쟁의식과 체면문화 때문에 자신의 운을 갉아먹는다는 지적이다. 경쟁과 체면을 의식하는 순간 불안의 싹이 자라면서 내 안에 부정적 에너지가 생기고, 그 때 불운이 들어온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으니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못 된다고 한다. 동양철학적 관점에서만의 얘기도 아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와이즈먼 박사 역시 천재지변이나 복권당첨 같은 ‘완벽한 우연’은 사람이 어쩔 수 없지만, 운은 바꾸기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행운을 끌어당기는 4가지 요소

그는 항상 운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4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생김새나 지능과는 관계없이 행운을 끌어당기는 4가지 요소를 찾아냈다.

첫째, 행운인은 기회를 잘 만들고, 포착하고, 기회에 잘 반응한다. 불운인보다 더 자주 웃고, 남들과 눈을 더 자주 마주쳤다. 삶의 태도가 느긋했고,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이었다.

둘째, 행운인은 예감능력이 좋아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결정을 하는 반면 불운인은 잘 속는 경향이 있다.

셋째, 행운인은 좋은 일을 회상하면서 앞으로도 행운이 지속되고 삶은 살 만하다고 믿는다. 불운인은 끊임없이 불행했던 순간을 반추한다.

넷째, 행운인은 불운을 행운으로 바꿀 줄 안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도 ‘목이 안 부러진 게 얼마나 다행인가’ 위로하며 극복한다.

결론적으로 와이즈먼 박사는 행운은 학습이 가능한 사고와 태도, 행동의 산물이라며 일상 습관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안 먹어본 음식이나 안 보던 TV 프로에 눈길을 주고, 100원 짜리 동전을 주운 것과 같은 작은 행운조차 일기에 써보라고 권한다. 결국 동서양 할 것 없이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오랜 격언과 여기 따라야할 노력을 재확인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내게 떨어진 행운의 감을 사진 찍어둔 건 잘 한 일인 듯하다. 오늘의 운세 보다는 감 사진에 눈도장을 찍는 게 행운을 끌어당겨 운수 좋은 날을 열게 할 것 같다. 운수 좋은 날들로 운수 좋은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 맞이하노라면 운 좋은 노인이 되어가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르스는 말한다. “운이 좋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일생을 잘 살아온 늙은이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는 신념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고 운수에 끌려 방황하지만 늙은이는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그 생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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