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國이 잘살아야 저도 대접받지요"

"50년 전 한국을 떠날 때 내가 형편이 좋아지면 한강 다리 밑의 판잣집에 살던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매년 새해 첫날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고국에 적십자회비를 보내는 일이었어요."

1967년부터 적십자회비를 50년간 꼬박꼬박 대한적십자사에 보낸 홍경도(86)씨가 14일 서울 명동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해 10만원의 회비를 냈다. 파라과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3년 전 귀국해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다.

평남 남포가 고향인 홍씨는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해 자동차 부품상으로 전국을 떠돌며 어렵게 살다가 1966년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났고, 1968년 다시 미국으로 갔다. 영어는 잘 못하지만 손재주를 살려 뉴욕에서 치과 기공 일을 배웠고, 치과 기공 회사에서 평생 일하다가 지난 1994년에 정년퇴직했다. 퇴직한 뒤에도 적십자회비 내는 일은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파라과이에 살 때는 회비를 보낼 통로를 찾지 못해 영사관이 있던 아르헨티나로 편지를 보내 회비를 고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홍씨는 "이민 가는 것은 시집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친정이 잘살아야 대접받고 친정이 어려우면 냉대받기도 하잖아요. 외국에 살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잘살게 되길 언제나 기원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적십자사를 선택해 처음엔 가족 5명이 벽돌 한 장씩 쌓는다는 생각에 10달러씩 50달러를 보냈고, 차츰 생활이 안정되면서 매년 100달러씩 보냈다고 한다.

홍씨는 생활의 터전이 된 미국의 적십자사에도 매년 똑같은 금액의 회비를 냈다. 그의 이런 나눔 정신은 미국 현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도 그가 재작년 귀국한 뒤에 특별히 초청, "해외 동포 중에서 이렇게 고국에 적십자회비를 꾸준히 보낸 분은 유일하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적십자회비는 1~2월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1만원씩 정액으로 모금하는데 작년에는 398만명이 474억원을 기탁했다.

실향민 홍씨는 "내가 북한 고향에 있을 때 혈서를 쓰면서 '반공동지회'에 가입해 치안 유지에 앞장섰는데, 국군이 후퇴하면서 혼자 월남했다"며 "뒤에 소식을 들으니 부모님들이 모두 나 때문에 처벌됐다고 해서 너무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홍씨는 "선진국이 되려면 남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며 "귀국해보니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면서 그런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연금 생활자인 그는 "죽을 때까지 적십자회비를 내겠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일에 소중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