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01 15:09

나는 지금 TV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이하 꽃 누나)'에서 크로아티아 여행을 방영할 때 잠깐 들렸던 동화 속 마을 라스토케로 가고 있다. 물 위에 지어진 집들,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곳, 아직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곳. 모든 것이 신기한 이 작은 마을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달리는 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흡사 우리나라의 늦가을 시골 길을 연상케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는 있으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차들이 그저 드문드문 지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요정이 곁에 다가올 것 같은' 라스토케' 마을.
▲금방이라도 요정이 곁에 다가올 것 같은' 라스토케' 마을.

저녁 무렵에야 라스토케에 도착했다.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단풍도 하나둘 떠나가는 마을. 분명 을씨년스러워야 할 마을 풍경은 아름다운 독특한 풍경으로 우리를 맞았다. 여행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던 행운은 여기서도 있었다. 사실 꽃 누나 촬영 시만 해도 입장료를 받지 않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연히 마을을 제대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니 돈이 들 테고 그러자면 입장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수기인 10월을 지나 11월에 찾아온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푸근하면서도 합리적인 그들의 생활방식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이 같은 폭포는 '라스토케' 마을 곳곳에 있다.
▲이 같은 폭포는 '라스토케' 마을 곳곳에 있다.

라스토케는 약 300년 전에 폭포 위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레방아는 물 위에 설치하는 것이니 당연히 물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러니 물레방아는 당연히 집 안에 있을 거고. 쉽게 이야기하면 집 거실 밑으로 주방 밑으로 폭포가 흐르고 물이 흐른다는 이야기다. 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집이 들어 서 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라스토케란 뜻은 ‘천사의 머릿결’이란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요정이 사는 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폴리트비체의 작은 호수’라 불리기도 한다니 헷갈린다, 이 마을은 코라나 강의 물줄기가 마을로 흘러들어 작은 폭포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도 돌리고 농사도 짓는다. 라스토케란 말이 현지어로 ‘물레방아’란 뜻이라니 내 생각으로는 이 뜻이 더 맞지 않나 싶다. 뭐 아무렴 어떤가. 나야 이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는데.

내 나이대라면 우리의 옛 저녁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작은 마을의 집집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모습. 내게 처음 얼굴을 들어낸 라스토케는 꼭 그런 풍경으로 다가왔다. 비탈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는 길.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온다. 라스토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사과나무에서 빨간 사과 두어 개가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나를 반긴다.

물소리 바람 소리에 어울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도착한 때가 저녁 무렵이라 불이 켜져 있는 집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유럽의 전등이 대부분 그렇듯 형광등이 아닌 주홍빛의 백열전구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빛은 내 마음속 추억을 한 페이지를 열었다. 그래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30촉이나 50촉 백열전구, 유리구 속 필라멘트가 만들어내는 오묘하고 차분한 빛이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를 푸근히 감싸 안았던 기억을 먼 이국의 나라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다.

▲'라스토케' 마을 속 작은 카페.
▲'라스토케' 마을 속 작은 카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니 집 한 채가 유독 눈길을 잡아끈다. 커피 등을 파는 작은 카페다. 들어가는 입구를 제외하고는 삼면으로 다 물이 흘러간다. 사람 사는 동네로 흐르는 물이 이 집 저 집 담벼락이나 집 벽을 스치며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집 밑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는 풍경이다. 마을 곳곳에 작은 폭포들이 있고 그 폭포 위에나 아래쪽에 집을 짓고 사는 그들. 흘러가는 물소리가 분명 작은 물소리는 아닌데 밤에 잠은 어찌 자나 슬며시 걱정스럽다. 어쩌면 흘러가는 물소리가 자장가쯤으로 들릴 수 있겠다 싶다. 동요 '섬 집 아기'에서 보면 아기가 파도 소리를 자장가처럼 느끼며 잠드는 것처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라스토케 마을의 지질은 오랫동안에 걸쳐 물이 흐르며 바닥이 석회화되었다고 한다. 깊은 동굴에서 보는 석회암으로 형성된 종유석이 얼마나 단단한지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쉽게 땅이 무너질 리 없다. 그 석회암 땅 위로 강물이 흘러가고 강물 속에 나무가 자라고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곳에 사람이 대대손손 이어가며 사는 것이다.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사람은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람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흘러가는 물이 얼마나 맑은지 신기해 손을 담가 본다. 하얗게 부서지며 흐르는 물살에 어느 게 손인지 물인지 경계도 흔들려 알 수가 없으니 물의 깊이야 모르는 게 당연하다. 손을 스치며 흘러가는 물의 감촉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손에 닿는 촉감은 상쾌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강물 흐르는 소리까지 경쾌하니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살다 보니 참 이상한 나라에도 다 와 본다. 마치 내가 동화 속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잠시 마을 풍경을 바라보며 누가 나보고 왜 여행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해 본다.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이다. 그냥 좋아서 떠날 뿐이라는 게 그동안의 생각이었는데 이 마을을 들여다보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그것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들이 여기서 여지없이 깨어지며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편견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여행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검증할 기회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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