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풍경에 푹 빠져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행도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동굴을 뒤로한 버스는 저녁 무렵에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시내로 접어들었다. 어라? 생각보다 큰 도시다. TV에서 ‘꽃보다 누나’에서 보이는 자그레브는 돌들이 깔린 길과 아담한 성곽들로 이루어진 작은 소도시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둘러보니 현대적 도시의 활기찬 모습과 중세의 낭만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는 도시다.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매력이 있다.
버스에서 어둠이 막 내리기 시작한 자그레브 구경에 나섰다. 조금 의아했다. 왜 어둠이 내리는 이 저녁 무렵에 이곳에 왔는지 혼자 속으로 툴툴거리며 반들거리는 돌 바닥 길을 걸어 ‘스톤게이지(stone gate)'를 보러 얕은 비탈진 길을 오르니 고딕양식의 철망으로 쳐 놓은 곳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그 안에 빛바랜 성모 마리아상 그림이 있었다. 바로 여기가 ‘스톤게이지(stone gate)' 란다. 크로아티의 전 중세도시인 그라텍에는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성벽을 쌓고 네 개의 성으로 통하는 관문이 있었단다. 그런데 이 성이 1731년 발생한 대형 불이 나 다 타버리고 유일하게 한 관문만 남았었다. 이 관문에는 성모 마리아상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이 그림만 유일하게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자기의 소망들을 적어 이 관문에 붙여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소원들이 마리아상 그림 옆 벽에 붙어 있었다. 빽빽하게 붙어있는 저 소원들은 과연 다 이루어졌을까 궁금증을 안고 비탈 진 길을 바삐 걸어 오른다.
반짝이는 돌길을 걸어 작은 골목길을 돌아서니 어둠 속에 성 마르코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흡사 장난감 같다. 언뜻 북유럽 스타일 느낌도 든다. 빨강, 파랑, 하얀색의 타일로 알록달록 붙여놓은 모양새, 경사가 심한 지붕과 단순한 선들 하며 지금까지 보아 온 건물들하고는 좀 다르다. 흡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레고로 지은 집 같다. 지붕에는 두 개의 문장(紋章)과 적/백/청의 삼색의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왼쪽 문장(紋章)은 크로티아 왕국이고 오른쪽 문장(紋章)은 자그레브시의 문장이란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국기에서도 볼 수 있다.
다시 고풍스러운 길을 걸어 성 마르코 성당을 돌아보고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국회의사당이다. 그런데 이 주변 가로등이 어딘가 다르다. 그냥 유럽의 밤 풍경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백열등 불빛이라도 많이 어둡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옛 고향 길목 어귀에 밤이면 밝히던 작은 30촉 백열등 전등 정도의 불빛이다. 경제가 아주 안 좋은 나라인가. 내가 크로아티아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나 생각했었는데 가스등이란다. 옛 흑백 영화 속에나 등장하던 가스 가로등이다. 알고 보니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가스등을 설치한 곳이라 하니 요즘의 가로등의 원조인 셈이다. 저녁에는 일일이 불을 붙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내가 갑자기 19세기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라면 아마 지금쯤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가로등이다. 다시 한 번 가스등을 쳐다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야 하는지, 흐르는 세월에 고집스레 지키고 있는 그 모습에 혀를 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어둑어둑한 가스등 불빛 아래를 걷는다. 작은 돌들이 가스등 불빛 아래 반짝이는 길을 걷는다. 어느 나라나 구도심의 길은 구불구불하고 작다. 작으니 더 정감스럽게 다가온다. 자연스레 고향 집 골목길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달리다가 걷다가 지치면 잠시 골목길에 주저앉아 땅따먹기도 했다. 작고 동굴동굴한 돌들을 주워 모아 공기놀이도 했던 골목길이었다. 헌데 고향을 떠나 십수 년이 흘러 찾아간 골목길은 어른 두 사람이 스쳐 가기도 버거운 좁은 골목길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골목길이 딱 그만큼의 넓이다. 그 작은 골목길을 추억에 잠겨 걸으며 돌아 나오니 작은 카페들이 가스등 아래 뜨문뜨문 보인다. 그중에서도 이색적인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분명 카페 같았는데 이별 박물관이란다. 뭐 이별식을 하는 곳은 아니고 죽음이 갈라놓았거나. 혹은 헤어지는 연인들, 부모님, 친척, 배우자 등등 세계 어디서나 보내온 사람들의 이별에 관한 물품과 사연들이 전시된 곳이다. 참 별별 박물관도 다 다녀봤지만, 이별 박물관은 처음이다. 호기심에 창문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니 사랑할 때 주고받았을 편지들이 바구니에 소담스럽게 담겨 있다. 그 옆에는 화사한 꽃무늬의 양산도 있고 굽이 10cm도 넘을 성싶은 구두코가 뾰족한 검정 구두도 있다. 꼭 미국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신었을 것 같은 멋쟁이 구두다. 무슨 사연인지 알 수는 없어도 새것인 걸로 보아 미처 신어보지도 않은 구두 같다. 그 옆에 천으로 만든 작고 앙증맞은 강아지도 보인다. 사연이야 다른 물건들처럼 옆에 적어 놓았지만 그걸 읽어내기엔 내겐 너무 벅차 읽으려다 그만두어버린다. 짐작건대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가 기증한 게 아닐까 싶다.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져 온다.
그 옆에 검정 목도리로 시선을 옮겨 간다. 분명 손으로 한 코 한 코 뜬 목도리다. 저 목도리를 뜨면서 행복했을 아름다운 여인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서 문득 목도리를 주고받았을 연인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비록 헤어져 목도리가 이곳에 와 있지만 그때 그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런 카페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 전 연인에게 받은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갖고 있기엔 부담스러운 물건들을 이런 카페에 두면 먼 훗날 문득 생각날 때 찾아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두 연인이 하얀 머리칼을 날리며 재회할 수도 있고…. 혼자 빙그레 웃는다. 엉뚱한 발상으로 전개해 나가며 소설을 쓰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다. 다른 나라말을 모른다는 것. 이렇게 엉뚱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이다.
문득 내 물건 하나를 이곳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고 싶으나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잊으려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들. 한 번쯤 꿈에라도 만나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 하나쯤 이곳에 두고 싶다. 아버지가 받았던 무공훈장, 할머니와 엄마의 손때가 묻은 나무 함지박, 혹은 그가 보내왔던 핑크빛 편지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별 박물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재촉하는 소리다. 떠나기 싫은 발걸음을 돌려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뛰어간다.
어두운 길을 더듬대며 좁고 협소한 옛길을 걸어 도착하니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다. 케이블카 선로를 내려다보는 순간 웃음이 터진다. 케이블카 타는 길이라고 해봐야 50미터나 될까? 그러니 웃음이 안 터지고 배기겠는가. 이 케이블카는 ‘퍼니큘라’라 부른다. 말이 케이블카지만 공중에 달린 케이블카가 아니고 레일 위로 내려가는 전철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내 돈 내고 타라 했으면 안타고 옆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겠지만 안내하시는 분이 태워준단다. 공짜라기에 한 칸짜리 퍼니큘라에 냉큼 올라탔다. 아마도 100년이 넘었다니 그 옛날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겨울 눈길에 넘어질까 하여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타자마자 퍼니큘라는 ‘반 옐라치 광장’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이순신 같은 이 나라의 영웅 ‘반 옐라치 장군’이 말을 타고 서 있는 곳이다. 동상을 중심으로 광장 곳곳에 축제가 벌어진 것 같다. 불타는 금요일이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야시장이 열렸다. 이곳 저곳 기웃대며 광장 밤 풍경에 푹 빠져 본다. 여유롭기 그지없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는데 나그네 발걸음은 아직 타향 땅에 머물고 싶다. 여유롭고 조금은 한가하고 조금은 들뜬 그런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여간해서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넘치는 인파 속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내가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꼭 알맞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처럼 하는 여행이 좋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풍경에 들어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