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17 10:00

이른 아침, 산으로 오른다. 비탈진 곳에 서리가 마른 풀잎 위에 하얗게 앉았다가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인다.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간밤에 잡다한 꿈에 시달린 탓에 멍해진 머릿속을 차고 맑은 공기로 헹구어내며 걷는다. 길섶에 겨울눈을 달고 봄을 기다리는 개나리 숲에 멧새 떼들이 푸드득 날아오른다. 내 발걸음 소리에 놀랐나 보다.

산에 올랐던 일행들이 곁을 스치며 내려간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가벼운 묵례를 잊지 않는다.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다. 너희 때문에 잠 한번 느긋하게 자지 못한다고 좀 있다 오르면 안 되느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 같다. 하긴 숲 속의 친구들에겐 동트기 무섭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니어 에세이] 겨울 산을 오르며…
사진=조선일보DB

작은 골짜기 사이에 놓인 나무다리를 걷는다. 지난밤 내린 서리가 아직 하얗게 아직 머물고 있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흔적을 피해 서리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걷는다. 뒤돌아보니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저 발자국도 곧 따라오는 햇살에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내 지나온 세월도 시간이 지나면 저러하리라.

오르막길이다. 양옆 산비탈에는 상수리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아침 햇살에 지난밤 내린 서리는 이미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없다. 서리가 떠나간 자리에 갈색 빛 색깔이 한없이 깊다. 세월 탓일까? 아님 모든 것을 초월했기 때문일까? 꽃처럼 화려한 색깔만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끝을 모를 것 같은 깊고 따스함이 어쩌면 더 강렬하게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굵은 나무 등걸을 어루만져 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꺼칠꺼칠한 감촉. 꼭 몇 달 전에 떠난 엄마 손의 감촉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비록 껍질은 볼품없이 거칠 대로 거칠지만 단단하고 거친 나무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내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는 것을, 꺼칠꺼칠하고 투박했던 엄마의 손 속에 자식을 향한 한없는 애정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것처럼.

나이를 먹고 나니 요즘은 이런 모습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사람을 보는 눈이 뜨였다고나 할까. 갑각류처럼 껍질을 단단한 무장한 사람들이 더 여리고 따뜻한 사람들이었음을 자주 깨닫는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여리디여린 사람들이 외로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마음속에 섬 하나 만들어 놓고 견고한 껍질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고독하나 마음속에 기르며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살다 가는 게 인생이지 싶다.

나무 등걸을 쓰다듬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젖혀 나무 끝을 올려다본다. 아득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나뭇가지에 상수리나무잎 하나가 매달려 파르르 떨더니 이내 하늘로 날아오르다 떨어지고 만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한세월 살며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많은 말들을 참아내느라 얼마나 외로웠을까. 한 눈 한 번 팔 새 없이 한세월 살아내느라 누구보다 더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무 등걸을 가만히 다독인다. 곁에 있어 주지도 못하고 안아주지도 못하고 늘 스쳐 가기만 했던 나무에 고맙다고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다. 내가 그 나무의 언어를 알지 못해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 떠나가게 한 것에 대하여 때늦은 사과를 하고 싶다. 내 살기 바쁘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보낸 엄마에게 속삭인다. ‘엄마, 사랑해 고마워.’ 문득 흐렸던 하늘이 환해진다. 숨었던 겨울 햇살이 슬며시 찾아든다. 네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나뭇가지 끝이 가만히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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