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18 09:48

리뷰 |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한적한 저녁 무렵, 서울 대학로 연극 골목을 싱글거리며 빠져나왔다.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공연의 열기를 머금은 관객들 표정은 맑고 환해 보였다. 이미 익숙한 내용에 중년 배우들의 풍부한 연기가 더해지니, 마치 내 이야기인 듯한 느낌이 든다. 중년이든 아니든 웃다가 울다가를 몇 번 반복했을 거다. ‘그래,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하며….

고아가 된 이수일은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자라고, 그 집 딸 심순애와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갑부 김중배가 돈으로 심순애를 유혹해 둘은 결혼을 한다. 사랑의 배신감과 돈에 대한 분노로 이수일은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심순애는 복수의 칼만을 휘두르는 이수일에게 속죄하려 하지만….

19세기 말엽에 영국 런던 배경의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일본 오자키고요의 <곤지키야샤>로 각색했다. 그리고 이를 한국의 조중환이 번역한 <장한몽>은 일본 침략기에 우리 신문에 연재되었다. 이후, 국내에서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원제인 <장한몽>보다 주인공의 이름인 <이수일과 심순애>로 더 널리 알려졌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이냐? 굳게 맺었던 우리들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다니. 놓아라. 놓지 않으면, 이 다 떨어진 구둣발로 네 가슴 짝을 차버리고 말겠다!”

“수일 씨의 아픔이 사라지고 괴로움이 풀리신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이 멍든 가슴팍을 짓밟아주세요!”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
사진=올드 앤 와이즈 씨어터 제공
극중에 나오는 이 대사는 사랑의 불이 한창 타오르고 있는 젊은이에게는 참 우스워 보이기도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웃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이 대사는 우리네 가슴 귀퉁이에 계속 자리 잡고 있음을 어찌 부정하랴. 사랑을 지키려는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운 웃음과 눈물이 지금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또한 어찌 더 강조할 수 있을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이야기는 언제나 ‘자본 = 힘, 보석 = 사랑’이라는 등식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삼삼오오 모여 살 때부터 성립된 등식. 사랑의 비극이니 인생의 희극이니 하는 말이 생긴 시점이나 그 장소의 변수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이 등식은 맞을 것이다. 사람마다 달라지는 ‘돈과 사랑의 방정식’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이수일과 심순애>든, 그 어떠한 모습으로든 항상 답을 요구하고 있다.

그랬다. 사람은 분명 저마다 사랑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 무한대의 방식 중, 유독 나의 사랑만이 제일 멋지고, 가장 아프다. 하필 이때, 소꿉장난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옆집 여자아이가 땅에 밥상을 차렸다. 아이가 반찬도 떠서 주면, 부끄럽지 않게 나는 덥석 받아먹었었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오가던, 그래서 그 아이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고받던, ‘보석’ 사랑이 아닌 ‘흙밥’ 사랑이었다.

나도 그 사랑을 쫓던 이런저런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처럼 결혼했고, 그때도 관습대로 보석을 주고받았다. ‘흙밥’ 대신 ‘보석’ 사랑일 때도 행복했다. 이렇게 사람은 이런저런 종류의 사랑을 간직한다. 순간마다 달라지는 우리네 사랑이다. 뭐 달라진다 해도 중요하지 않다. 분명 사랑을 계속할 것이고, 그 마지막 사랑을 간직하고 싶어 하니까.

아무리 나이가 든다 해도, ‘흙밥’을 받아먹던 아름다움이나, <이수일과 심순애> 등의 사랑 이야기는 결국 같을 거라며 웃어본다. 이 생각이 나만의 즐거움은 아니리라. 나만의 것이라 우겨보지만, 꺼내놓고 보면 도토리 키 재듯, 사랑은 참 뻔한 것이니까. 결국은 ‘흙밥’ 사랑이라 생각하고 싶으니까. 그 뻔한 사랑을 하고 난 순간부터 무한대의 책임이 따르고, 그것을 간직하고 뒤적이다가 사라지게 된다.

공연을 보는 중간마다, 앞과 옆 관객의 표정을 몇 번 보았다. 나처럼 웃는지, 나보다 더 우는지, 나만큼 지금 느낌을 가슴에 밀어 넣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아니더라도, 한 편의 연극은 인생의 굴곡과 같다는 생각도 했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다는 것을 또 믿어보았다. 배우들도 연습하거나, 아니 연기를 하면서, 또 관중을 보면서, 나처럼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낭만악극 <이수일과 심순애>는 서울 대학로 아트윈씨어터에서 2월 28일까지 관객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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