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이라더니 참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졸업인가 싶은 아들에게 지금까지보다 더 큰 산이 나타났다. 바로 취업이라는 산이다. 어디 넘어볼 테면 넘어봐라, 팔짱을 끼고서 도도하게 버티고 서있는 것 같다. 취업 준비생, 이른바 ‘취준생이라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계급의 탄생’이니, ‘취업전쟁’이니 하는 책을 서점에서 봤을 때는 판매를 위해 과장된 제목을 쓴 줄 알았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1년 후에나 겪을 일이었으니까.
3월부터의 상반기 공채에 본격 도전할거라면서도 아들은 지난 연말 기말시험을 끝내자마자 몇 개 기업에 지원했다. 한 살 더 먹기 전에 구직 맷집을 키워보겠다는 각오였다. 정장을 사서 입고 사진을 찍어 지원서에 붙이면서부터 아들의 산 넘기는 시작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기본이고, 입사 지원동기, 본인의 비전, 지원 업무의 성공적 수행 가능성과 그 이유며 준비에 대한 구체적 서술 등 써낼 것도 많았다. 제한된 글자 수로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수없이 고치느라 한 기업에 낼 서류 준비에만도 아들은 한 달여를 끙끙대는 눈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취업의 첫 번째 관문인 서류 합격 여부부터 마냥 기다려야했다. 애초에 채용 스케줄을 공개하면서 그대로 이행하는 기업은 드물고, 대부분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서류 심사에 한 달을 넘게 끄는 건 그렇다 쳐도, 기다리고 기다려도 연락이 없으면 탈락으로 짐작해야 한다. 그 이유도 물론 알 길이 없다. 불합격했음을 명확히 알려줘야 제 때 다른 회사 지원을 준비하든지 할 터인데, 지원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 밖이다. 지원자나 그 가족이 현재 또는 미래의 고객일 수도 있건만, 채용을 이런 식으로 하다니?
‘취준생 룰’?
온갖 정성을 들여 써낸 지원 서류를 대행업체에게 먼저 넘겨 내용을 계량화해서 거르고, 그러다 어떤 기업은 합격자를 잘못 발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아들의 문제를 떠나, 취준생 100만 명 시대의 취업전선에서 산보다 더 거대한 ‘갑’의 존재가 실감됐다. 아무리 지원자가 몰렸다 해도 회사의 문을 두드린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실종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합격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탈락 사유를 이메일로 보냈던 한 중견기업이 왜 화제가 됐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돈 한 푼 안들이고 평판을 높인 기업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의 예의 실종이 기업의 채용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빈발한다. 마음을 담은 이메일이나 카톡을 보내고 며칠을 기다렸건만 무응답이기 일쑤인 경우도 그 하나다. 가면 오고, 오면 가는 게 소통의 기본인데, 무반응은 곧 무시로 여겨지면서 신뢰마저 흔들리게 된다. 더구나 비즈니스 관계인 사람에게 연락이 안 닿고, 소위 ‘잠수 탄다’가 돼버리면 예의 실종 정도가 아니라 비상사태 발생 경보가 울리는 셈이다. 무엇보다 무반응에 극히 예민할 기업이 지원자들에 대해서는 왜 그리 반응에 인색한지 알 수 없다.
행여 지난해 파문을 일으켰던 ‘땅콩 회항’이나, 식품업체 회장님의 운전기사 폭행과 같은 ‘오너 갑질’만 없어도 다행인 걸까. 미국에서는 ‘웨이터 룰’이, 우리나라에서는 ‘캐디 룰’이란 게 기업 CEO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웨이터나 캐디, 부하 직원 같은 약자에게 대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약자에게 무례한 사람과는 거래하지 말라는 조언까지 곁들여진다. 기업 앞에서 한없는 약자가 취준생이고 보면, ‘취준생 룰’도 생겨날 법 한데 말이다. 하기야 잊을만하면 갑질 논란이 불거지니 룰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최대한의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