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2.29 10:44

아파트 현관을 쓸고 닦다가 신발장을 열고 신발 정리에 나섰다. 신발장 정리를 언제 했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니 엉망인거야 말 할 나위가 없다. 이 칸 저 칸에 마구 흩어져 넣어져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 했다. 계절별로 구역을 정해 정리를 하다가 아래쪽 구석에 몰려있는 구두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분신 같았던 구두들이다. 빨간색도 있고 검정색도 있고 밤색도 있다. 신발장 아래쪽 어두운 곳에 놓여 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한 때는 끔찍하게 아끼던 구두들이건만 지금은 그 곳에 놓여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산지 오래다.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중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이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소설이다. 이문열 소설가가 글을 쓰고 제목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로 정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유희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라는 제목의 시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이 제목은 많은 이들이 글을 쓸 때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다. 문장의 해석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남에게 없는 날개가 달려 한 때는 행복했겠지만 그 날개가 제 구실을 못 할 때는 추락하고 만다는 이야기가 대체적인 해석인데 이 구두들도 추락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미 추락 할대로 추락 했다. 

[시니어 에세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사진=조선일보DB
젊은 날의 꿈은 높은 곳, 더 높은 곳에 있고 싶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더 잘나 보일 것 같았다. 높은 곳에 서서 걸으면 나를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세상이 나를 우러러 볼 거라고 생각 했다. 3Cm쯤 높은 구두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낮아야 5Cm, 높으면 10Cm까지도 겁 없이 구두에 날개를 달았다. 발가락이 서로 겹쳐져서 아프건 말건,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다리야 붓건 말 건, 젊음이란 나이는 한 잠 자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발을 혹사 시킨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높은 곳에 서겠다는 꿈을 위해선 당연히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 지킨 내 꿈의 날개가 절망이란 날개를 달고 추락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발바닥이 아프기 시작 했다. 처음엔 그냥 아픈가?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더니 어느 날부터 아침에 방바닥에 발을 디디면 발바닥에 통증이 오기 시작 했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하면서도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그냥 낫겠지 했다. 워낙 건강 하나는 자신하고 사는지라 그게 뭐 그리 대수일까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날이 갈 수 록 아픔은 점점 강도가 심해 졌다. 겁이 났다. 이대로 못 걷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통증 크리닉을 찾았다.

족적근막염이란다. 병명도 처음 들어 본다. 이 병은 불편한 신발을 신고 너무 오랫동안 서 있거나, 많이 걸으면 오는 병이란다. 평생을 서서 일하는 직장에 근무 한 것도 모자라 퇴직하자마자 건강을 지키겠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만보걷기를 한 결과였다. 그 것도 운동화라고 신는다고 신은 것이 굽 높은 운동화였으니 발에 대한 학대도 그런 학대가 없었던 것이다. 내려와야 했다. 오만으로 가득 찼던 마음을 비워내고 낮추어야 했다.

낮은 신발로 갈아 신었다. 아무도 내가 추락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아니 아무도 내가 높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은 탓이다. 우쭐대고 싶어 나 혼자 용을 쓴 것이었다. 멈추어야 비로써 보이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비로써 자유로워지는데 지극히 속물이었던 탓으로 괜한 발에게 족쇄를 채웠다. 겨우 몇Cm 높은 곳에 있으면 무엇이 그리 달라진다고 혹사 시킨 발에게 미안하다. 안 그래도 늘 어둡고 침침하고 곰팡내 나는 곳에 사는 발을 위해 진즉에 내려왔으면 이 같은 고생은 더 안 시켰을 터인데.

다시 구두를 들여다본다. 버릴까? 말까? 혹시 모른다고 아직은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 젓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속삭인다. 더 이상 발을 혹사 시키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때가 되면 추락은 당연한 것이니 미련은 버릴 일이란다. 쓰레기봉지를 가지고와 추락한 날개들을 하나 둘 주워 담는다. 담아 낸 자리만큼 비워지는 곳으로 내려와 높은 곳에서 보지 못 한 것들을 찾아 남은 생을 걸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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