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3.09 17:05

영화 동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일이란 참으로 쉽지 않다. 말로 약속하지 않아도 묵묵히 생각한 바를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 윤동주는 그래서 짧지만 한반도 몸통만큼 굵직한 모습을 우리에게 남긴 사람이다. 영화 속으로 함께 사라진 송몽규도 그랬다. ‘한 번 뜻을 세웠으니, 또 행동으로 옮겨봤으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말하며….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난 내내 꿈속에 빠져들었다. 극장 안이었는지, 영화 속이었는지, 꿈 속이었는지, 혹은 내 안이었는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마다 꿈밖을 추억의 열차가 들락거렸다. 꿈 이쪽은 극장이었고, 꿈 저쪽은 모두 흑백 그림이었다. 어떤 그림은 그냥 멈춰 서있었다. 나는 그림 속에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그림을 보기도 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보면, 그림 속 그 누구의 옷자락을 문득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런 나를 힐끗 보다가 관객인 또 다른 나를 보고 묻는다. ‘그 나이 먹도록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영화 동주
화들짝, 꿈인 듯 영화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래, 대답을 해야 하긴 했다. 어찌 누구라서 윤동주처럼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에겐 교회 장로인 할아버지와 교사였던 아버지가 있었던 평온한 집안 정서를 괜히 부러워하며, 비겁하게도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주에서 서울이며 일본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의 교육 환경이 주어졌으니, 그 정도 못할 것이냐?’ 라는 오기와 질투가 앞을 가린 것.

영화는 가끔 지나온 날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 <동주>는 더욱 그렇다. 돌아보면 순간마다 내 꿈이라며 펼치려 했던 내 행위들이 영화 편편 그림자가 되어 언뜻 비쳤다. 확신을 가지고 나만을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이려 했던 일들이었다. 지나온 것은 모두, 자랑이든 부끄럼이든, 흑백이 분명한 것 먼저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비겁하게도, 나는 그중에서도 좋은 것만 드러내고 펼쳐놓으려 했다. 허, 감히 그들의 시간과 의미와 나이를 견주려 하다니! 더욱, 그들에게 또 나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또 어김없이 누구에게나 봄은 찾아온다. 그러나, 동주나 몽규는 여러 봄을 맞이했겠지만, 다가오는 새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부끄럽지만, 나이가 한두 살 먹을수록 다시 맞이하는 봄을 또 새롭게 느끼고 싶은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중년의 나이에 본 영화 <동주>는 평범한 이야기를 새삼 떠오르게 했다. ‘너도 너만의 뜻을 아름다운 꿈에 담아라.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뜻을 계속 씻고 다듬어라. 다듬는 순간이 곧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그 순간의 즐거움을 누려라!’ 라는 참 오래된 이야기를.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다시 뜻을 세우고 만지며, 그곳을 향해 움직이는 즐거움이란 영원한 것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 이건 분명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영화 <동주>를 본 사람 대부분은 윤동주나 송몽규처럼 살고 싶을 거다. 자유니 민족이니 독립이니 시인이니 하는 수식어 때문이 아니다.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떳떳하게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요, 그 매 순간마다 나에게 주어진 그 길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가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 길 위에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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