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 5천 명의 이름이 깨알 같은 글씨의 자막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화 '귀향'을 제작에 후원한 개인의 이름이었다. 영화제작사의 자금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 순수한 개인의 의무감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과 분노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나뿐만이 아니고 함께 그 상영관을 나오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귀향의 줄거리는 2002년도 조정래 감독이 만났던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할머니들은 이 내용이 실제상황의 십 분의 일 정도가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에 무게감이 더해져서 차마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종종 포스터만 바라봤다. 그러다 우연히 아침 방송에서 귀향의 제작과정을 보게 되었다. 조정래 감독의 전세금까지 투입되었고 영화제작에 함께 참여하였던 PD는 스트레스로 온몸이 평소의 세배로 부어오르는 병마와 싸우면서 만들어 낸 영화다. 배우들은 출연료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어서 모두 재능기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도 기부형식으로 출연진에 합류하게 됐다. 위안소에서 촬영할 때는 모든 스텝들과 배우들이 함께 울면서 촬영을 하였다고 한다.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위안소는 배우들도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위안소를 들어서면 평소보다 체온이 떨어졌고, 촬영 기간 그들은 그곳이 너무나 두려워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 귀향의 귀는 '鬼神'을 부르는 '귀'자 라는 해석을 붙이고 있다. 위안부 소녀들의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모셔 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제작된 혼의 귀향이다. 국제외교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되어 있는 영화의 내용으로 영화가 상영거부를 당하게 되면 마을회관이라도 돌면서 꼭 상영하겠다는 의지로 완성된 영화다. 그 시간이 상처의 치유가 되어 의지와 용기의 시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역사를 배우면서 알아가는 것은 수치스러운 역사라 하여도 분명히 남겨지는 교훈이 있다.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론으로 남겨지는 내용의 입력이 아닌 삶이 지닌 보편성으로 이루어가는 교훈과 반성이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역사라 하여도 그 의미와 가치가 사라진다.
우리는 그 상황이 만들어진 원인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별한 행사의 중계방송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나는 귀향 때문에 삼일절 행사를 보게 되었고. 3·1 독립선언문의 전문을 끝까지 듣게 되었다. 천도교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의 종교인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작성된 독립선언문은 지금 들어도 가슴을 울리게 하는 품격을 갖춘 명문이었다.
그 독립선언문에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가야 하는 길의 제시가 되어 있었다. 온 국민이 함께하는 의지로서만이 그 처절한 고통의 대가를 이루어가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만이 소녀 정민과 함께 하였던 영혼들에 대한 위로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던, 어떤 삶이라도 살아내어야 하는 인간 삶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