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하러 욕실에 막 들어서려는데 책상 위 핸드폰이 울렸다. 얼른 가서 보니 친구 이름이 떴다. 지방에 살아 일 년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친구다. 통화보다는 운동 후 찐득한 땀을 씻어내려는 마음이 앞섰다. 또 전화하겠지 뭐. 저녁엔 뭘 해먹나.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면서 머릿속은 냉장고 안의 재료를 요리조리 꿰맞추기에 바빴다. 욕실을 나서자마자 지지고 볶아 식구들과 저녁을 해치웠다.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나서야 전화 생각이 나서 들여다봤더니 아까 친구에게서 긴 문자가 와있다. 그런데 어째 시작이 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저 OO 예요. 잘 지내시죠? 엄마 발인이 어제 있었어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차마 전화 못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엄마가 그간 조금은 아프셨는데 아마 엄마 자존심에 주위 친구분들에게 안 알리셨던 것 같아요. 엄마 발인 전에 저라도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늦게 안 좋은 소식 전해서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구보다도 짱짱했고, 자신은 물론 집안 관리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해서 얄미울 정도였는데. 믿기 어려웠다. 친구의 번호로 그 딸에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통화하는 순간 친구의 죽음이 현실로 확인될 것 같았다. 멍하고 있는데 다시 그 번호가 떴다. 친구 남편의 전화였다. 폐암이었다며, 가족 외엔 아무에게도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원치 않았다며, 도저히 실감할 수 없다며 그는 흐느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럴 수가….
인생의 3가지 ‘걸’
다음 날엔 지역문화프로그램에 함께했던 동년배의 부음을 들었다. 온유함과 열정을 갖춘 리더였는데, 탐사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한 선배의 생일 축하자리에서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는 말만 되풀이하게 됐다. 선배는 “지난 한 해 주변에서 11명이나 세상을 떴다”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지방에 내려간 김에 거기 사는 지인을 만났는데, 나 몰래 호텔비를 냈기에 저녁만큼은 내가 사게 해달라고 우겼다. 그 며칠 후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들었다. 저녁이라도 대접하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뻔했다.”
나는 친구가 또 전화하겠거니, 친구를 또 만나겠거니 했는데…. 좀 까칠한 데가 있기는 했어도 자주 만나볼 걸…. 한동안 먹먹함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좀 더 베풀면서 살걸, 좀 더 용서하면서 너그럽게 살걸, 좀 더 재미있게 즐기면서 살걸. 인생에는 이 3가지 ‘걸’이 있다더니 나도 ‘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선 살아있음의 소중함이 솟아나 온몸으로 번져가는 듯했다. 뭔가 하는 ‘Doing’으로써가 아니라 존재하는 ‘Being’ 자체로 기쁘고 감사하란 말은 귓등으로 듣고, 늘 뭔가 해야 하는 나였다. 그런데 가만히 햇살만 받고 있어도 좋았다. 양지바른 곳에 하릴없이 앉아있는 백발노인들의 마음이 이러할까.
신문기사에서는 사람 이름 옆 괄호 안에 숫자 65만 들어가도 노인이라고 칭한다. 정부가 정한 기준엔 맞을지 몰라도 요즘 노인과는 동떨어진 나이다. 자녀도 웬만큼 키웠고, 매인 직장에서 놓여나 이제야말로 자기 삶을 시작하는 나이가 60대 아닌가. 그런데 60도 될까 말까 한 나이에 가다니…. 생일이었던 선배는 “70대가 되니 친구들과 만나면 장례며 묻힐 곳에 대해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고 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살아있는 친구들보다 간 친구들이 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 죽음도 삶의 변형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이 되려나.
있을 때 잘하지
톨스토이는 “죽음을 망각한 생활은 동물의 상태와 가깝고,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신의 상태에 가깝다”면서, “오늘 밤까지 살아라. 동시에 영원히 살아라”고 했다. 바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죽음을 기억하기에 삶은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얘기다. 죽음을 기억할 때, 매 순간은 선물로 느껴지게 된다. 순간마다 충실한, 가장 삶다운 삶을 살게 됨으로써 현재가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행복한 삶이다.
인생 백세시대라 하건만, 일찍 떠난 이들에 대한 애석함이 커선지 행복한 삶이 부디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행복수명이 길어지려면 건강수명에 경제수명, 가족과의 소통수명까지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한다. 3박자가 좀 덜 맞거나, 성에 차지 않으면 행복수명이 짧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성공이 별건가. 살아남는 게 결국은 성공임을 점점 더 깨달아가게 된다. 장사도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틴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로마 시대 개선장군이 시가행진할 때, 행렬 뒤에서 노예들이 외치게 했다는 라틴어다.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개선장군인 당신도 언젠가는 죽으니 우쭐대지 말고 겸손하란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내 죽음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건 지금 내 곁에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앞서 탐사 사고로 동료이자 산골 마을 이웃을 잃은 이가 인터넷 밴드에 올린 글 한 대목이 뜨끔하게 다가온다. ‘…살아있는 내 얘긴 없고, 있을 때 잘하지, 없으니 와서 나무도 해주는 거겠지만, 쩔쩔맬 때도 있었을 건데 이제야 돈 봉투 디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