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도 블랙박스 단다

지난 2014년 7월 강원도 태백에서 승객과 승무원 총 111명을 태운 무궁화호 열차와 관광열차가 정면충돌해 1명이 숨지고 91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두 열차가 교차해야 할 역에서 관광열차가 정지 신호를 위반하고 계속 달리는 바람에 빚어진 사고였다. 이 사고는 관광열차 기관사 A씨가 스마트폰 메신저를 사용하느라 정지 신호를 보지 못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사고 원인은 검찰 수사까지 진행된 이후 한 달여 만에 간신히 규명됐다. A씨가 이 같은 사실을 함구한 데다, 운전실 내 상황을 알 수 있는 객관적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 기관사의 주의 태만이나 과실로 인한 열차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코레일이 운행하는 844대 모든 열차 운전실에 블랙박스가 연내 설치된다. 이 블랙박스는 운전실 내 계기판과 기관사가 각종 기기를 조작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실시간 기록하게 된다. 열차 맨 앞에는 전방을 촬영하는 블랙박스도 함께 설치된다.

코레일 관계자는 "철도안전법상 블랙박스 영상은 사고 조사·범죄 수사 등을 위해서만 확인이 가능하지만 블랙박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관사들이 열차 운전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라며 "블랙박스가 설치되면 승객 안전이 크게 개선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현재 길게는 몇 달씩 걸리는 사고 원인 규명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코레일에 따르면 해외에서도 열차 운전실 내 블랙박스 설치가 법적으로 의무화돼 있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열차 블랙박스는 비행기에 설치된 블랙박스와 달리 녹음 기능은 없다. 하지만 비행기의 고도·속도와 조종실 내 음성 등을 기록하는 비행기 블랙박스와 달리 계기판 및 조종사의 기기 조작 등을 영상 촬영하기 때문에 "비행기 블랙박스보다 운전실 내 상황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고 코레일 측은 전했다.

충돌이나 선로 이탈 등 열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 코레일 측이 해당 기관사에게 징계를 내리더라도 블랙박스 등 객관적인 증거가 없어, 과거에는 징계 취소 등에 대한 법정 소송이 매달 1~2건씩 이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코레일 노사는 지난 2013년부터 블랙박스 설치 논의에 들어가 작년 11월엔 모든 열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기관사들 입장에서는 일종의 '감시 장치'로 느껴질 수 있지만 노조 측이 '열차 안전 증진'이라는 취지에 공감을 해 준 덕분"이라며 "전반적인 열차 사고 건수는 연간 10건 이내까지 감소했지만 열차 사고는 1건이라도 발생하면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올 수 있어 블랙박스 설치와 같은 적극적인 예방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관사 노조는 처음에는 '인권침해'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작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국민의 생명과 신체 보호라는 공익을 고려할 때 최소한으로 제한되는 영상정보 수집은 법 위반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노사 간 협의도 속도를 냈다. 지난 1월엔 철도안전법이 개정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동력차에 영상기록장치(블랙박스)를 설치해야 한다'는 조항도 신설됐다.

한 철도 전문가는 "기록된 영상을 기관사들이 공유해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