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의 르네상스人] 3년간 110종의 怪力… '먹물 낭인'서 '만수르 기획자'로

출판사 글항아리에 '익명의 숨은 영웅'이 있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정직원 5명의 작은 출판사가 한 해 50여 종의 인문 양서(良書)를 펴내게 한 주역. '주간(週間) 글항아리'라는 위트 넘치는 별명을 갖게 한 외서(外書) 출판기획자이자 전(前) 글항아리 기획위원 노만수(47)씨를 만났다.

'전'이라는 관형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호형호제하는 글항아리 강성민(43) 대표가 최근 '형님'을 출판사 사계절로 '트레이드'했기 때문. 올해는 50종이 아니라 90종 출간을 예상할 만큼 성장했는데도, 흘러 넘치는 노 위원의 생산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 3년간 형님과 동생이 계약한 외서 기획안은 무려 110종. 형제는 "사랑하니까 (잠시) 헤어진다"며 짐짓 진지했다.

아마존 등 각국 인터넷 서점과 서평 사이트, 현지 언론 북섹션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 게릴라형 외서 기획자의 호(號)는 '무함마드 만부 만수르'(아랍 부호 이름을 빗대, 기획하면 1만부는 팔린다는 뜻). 줄여서 '백만부' 혹은 '만수르'다. 2014년 이슬람국가 IS의 유래와 정체를 밝힌 '이슬람 불사조'를 기획하며 붙은 예명이다.

지금이야 이런 유머와 여유를 갖게 됐지만, 몇 차례에 나눠 들은 '만수르'의 인생 스토리는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 전남 무안에서 소 꼴 베어 먹이던 궁핍한 유년, 합숙훈련하다 낫 들고 뛰어온 아버지 탓에 포기한 축구와 체대 진학, 누이와 남동생의 투병과 때 이른 죽음, 학생 식당 설거지, 건설 현장 막노동, 서점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대학 시절, 유일한 위로였던 시(詩)와 재학 중 당선한 신춘문예, 시위 현장서 죽은 친구 문상(問喪)을 위해 감행한 이등병 시절의 탈영과 자수, 신문 배달로 등록금 낸 일본 유학, 청 팔기군(八旗軍)의 후손이라는 아내를 만난 중국 유학, 그리고 가장의 책임감을 절감하게 한 마흔의 위기까지.

이 탐욕스러운 독학자(獨學者)이자 영어·중국어·일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한 외서 기획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기존 기업형 저작권 에이전시가 취약한 순발력과 성실한 비교 분석력이 '만수르'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자신의 취향보다 독자 입장에서 요약한 책의 리뷰, 판매 예측, 해외 언론 보도 비교, 같은 분야 비슷한 책과의 차별성 등을 A4용지 3~4장의 제안서에 꼼꼼하게 적는다. '팔기군 후예'인 아내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에게 지아비와 아비의 권위를 되돌려준 110종 계약이 그렇게 열매를 맺었다. 그는 "아마존이라는 탄광에서 금 캐는 광부처럼 책을 찾다 보면 하룻밤을 금방 팬다"면서 "글항아리 강 대표의 양서 출간 욕망과 '가장(家長) 만수르'의 궁핍으로 인한 전투력이 시너지를 불러일으킨 듯하다"고 했다.

기획한 110종 중 가장 성취감 높았던 책을 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세계가 출범한 1945년을 그린 '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이안 부르마·기출간)와, 4000명의 증언을 통해 제국주의 일본 육군의 오류를 논박한 '쇼와 육군 연구'(호사카 마사야스·이하 번역 중), 논어 대백과사전 격인 '공자사전'(푸페이룽), 전체주의와 악의 철학에 대한 논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베티나 스탕네트) 등 5권이 그가 제출한 리스트다.

얼핏 '닥치고 기획'일 듯한 생산성이지만, '절대 사양'의 책도 있다. 독재나 파시즘 찬양, 북한식 유사 봉건왕조 찬미, 종교·이념·사회적 약자 차별 조장 등 극단주의 사상이 담긴 책은 아무리 화제작이어도 거절이다. 비과학적 실용서나 인문성 결여한 자기계발서, 가십거리 책도 지양한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중매쟁이'로 비유했다. 아랫마을 갑순이와 윗마을 갑돌이를 맺어주는. 그의 고향인 무안 '깡촌'에서는 중매에 성공하면 이불 한 채를 받는다고 했다. '만수르'도 양서 한 권을 중개하면 '이불 한 채'(기획료)를 받는다. 그는 "독자의 가슴과 뇌에 무언가를 안겨주었다는 성취감이 들면, 나의 내면에서 이불 한 채가 집 한 채로 커진다"고 했다.

밤마다 양서(良書)의 금광을 캐며 대한민국 지적 인프라를 확장하는 무대 뒤의 숨은 영웅. 이 다재다능한 게릴라를 '무대 뒤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하 일문일답 전문]

-우선 부드러운 농담으로 시작해보자. 호가 ‘백만부’ ‘만수르’라고 들었는데. 이 호의 탄생 비화는.

“2014년 하반기 이슬람총서 10권을 기획할 때 국내에 최초로 이슬람국가IS의 유래와 정체를 소상히 밝힌 <이슬람 불사조>가 만부 이상 팔릴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강성민 대표에게 앞으로 나를 ‘무함마드 만부 만수르’(기획하면 만부는 팔리는 예언자 출판 갑부) 선생이라고 부르라 농담했다. 지인들은 가끔 나의 이름 때문에 ‘만수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때 대표가 앞으로 만부짜리를 계속 기획할 터이니, ‘백만부 만수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페이스북 봉봉철학관에서 점을 보았는데 ‘이번 생에 착하게 살았으므로 다음 생에는 만수르 손자로 태어남’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걸로 페북에서 한참 웃겼다. 댓글도 많이 달리고. <이슬람 불사조>는 만부까지는 팔리지 않았지만, <TV 책을 말하다> 등에 소개되며 큰 주목을 받고 4쇄는 찍은 듯하다.”

-외서 출판기획자란 직업 자체를 들어본 사람이 일반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일빛출판사 편집장을 그만두고 마흔 살에 프리랜서가 되며 원래부터 ‘외서 출판기획자’만 하겠다고 한 건 아니다. 국내 필자 발굴, 외서 소개 등 일반적인 ‘출판기획자’를 하려고 했는데, 페이퍼로드, 동녘, 실천문학사, 민음사 등에서 외서 검토를 자꾸 의뢰하다보니 외서기획 비중이 늘어났다.(페이퍼로드, 동녘, 실천문학사에서는 정식 기획위원으로 소액을 달마다 받는다). 주로 일본어, 중국어, 영어권 책들을 검토/기획했다. 4년여 간 외서기획을 하다 보니 ‘외서 보는 눈’이 늘었는지, 글항아리에서 기획위원 제의가 들어왔다. 글항아리는 양질의 외서 대작들을 많이 내니 죽이 잘 맞았다.

말인즉슨, 20~30대에 ‘취직용 스펙’ ‘공부 욕심’에 배운 외국어가 마흔 너머까지 살다보니 나를 먹여 살리고 있었고, 나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출판사들이 ‘외서 (전문) 출판기획자’라는 일종의 게릴라식 별종 직업을 만든 듯하다. 여기서 ‘게릴라’라 함은, 외서기획은 ‘속도감’과 ‘순간 판단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각국의 아마존과 주요 인터넷 서점, 신문 서평, 서평사이트 등을 최대한 빨리 읽으며, 아니다 싶은 책은 얼른 포기하고, 최대한 많이 보되 (한국에) ‘최대적정필요서’를 ‘최소한’으로 골라낸 다음, ‘집중적으로 오래’ 분석해야 해야 한다. 아마존이라는 탄광에서 금을 캐는 광부처럼 책을 찾다보면 하룻밤은 금방 팬다.

그리고 ‘별종’이라 함은, 이런 직업이 아직 한국에서는 드물다는 얘기이다.

에이전시는 ‘무조건 계약하면 장땡이다’라는 경영철학이 강해 책의 대강은 소개하지만, 책의 구체적 내용과 대중성(판매예측), 언론보도성, 타이틀의 차별성과 가치성 등등까지를 세세하게 판별해주지 않는다. 에이전시의 판단만으로 한계가 분명하기에 출판사들마다 사실은 일종의 ‘외서 (전문) 기획자’라는 조력자들이 간간히 산재해 있는 것 같다.

학부시절, 적은 정외과였으나 국문과인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았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크로스오버할 수 있는 차원에서 내가 만약 르네상스 (지식)인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교양독자 수준에 머물고 있는 자연과학 차원까지 넓히면 언감생심 틀린 정의다.

번역의 경우엔, <총, 균, 쇠> <사피엔스>처럼 자연과학까지 문명론 차원에서 다룬 책이라면 도전해볼만 하나 <이기적 유전자>나 <코스모스>처럼 자연과학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면 번역 도전하지 않겠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당신과 3년간 무려 110종의 외서 계약을 했다고 들었다. 이 숫자는 어떻게 가능했나.

“우선 개인적으로, 먹고 살기 급해서 일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지적 자산은 있으나 자리 잡을 곳이 없어 학원가와 출판가를 노마드처럼 전전하는 지식인들이 우리시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별종 먹물 낭인(?)들의 (지적)노동력을 착취하는 풍토가 (‘열정페이’처럼) 없어졌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눈칫밥도 못 얻어먹을 오버센스일까? 글항아리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해주었다.

두 번째 출판사 차원에서 강대표가 양서에 대한 욕심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편집장은 일중독 개미이다 보니 출간 종수도 많다. 강대표의 양서출간욕망과 나의 궁핍으로 인한 아마존 전장에서의 전투력, 이 두 가지 측면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듯하다.”

-책을 선택하는 절대적 혹은 상대적 기준은. 그리고 절대로 사양하는 책도 있으신지.

“물론 대중성까지 갖춘 학술서도 있지만…인문적 가치, 대중적 교양성, 독서시장에서의 적절한 판매성, (한국에서의) 유용성을 고루 지닌 ‘대중교양서’를 지향한다. 독재나 파시즘 찬양/북한식 유사 봉건왕조 찬양/남북대결 군사주의 조장/특정인물·종교·이념 우상화/사회적 약자 차별 조장/타자에 대한 배타주의/무조건적 개발성장 담론(환경파괴) 등등 모든 극단주의 사상이 담긴 책은 절대 사양이다. 그리고 비과학적 실용서나 인문성 결여한 자기계발서, 읽을거리가 아니라 가십거리 책도 지양한다. 또한 지나치게 선인세 즉 계약금이 높은 외서도 하지 않는다.”

-출판사에 보내는 제안서랄까. 샘플을 하나 첨부해 주신다면.

“글항아리 기획위원을 처음 시작할 때는 외서검토서를 보내고 일주일에 1번 꼴로 일산에서 대표와 만나 취중기획을 했다. 에이전시를 통해 검토서(파일)를 받거나 직접 구매해 읽어보고 책 내용과 예상판매부수 등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검증된 책은 외서검토서만으로 계약을 추진하였다.

첨부한 <쇼와 육군 연구>는 기타 참고 도서까지 전부 사서 검토하고 <쇼와 육군 연구>(국민대 정선태 국문과 교수, 현재 85% 번역)가 나온 다음 더 추진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1년(?) 쯤 지나 외서검토서 작성은 거의 하지 않고, 대표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며 검토하거나 만나서 기획회의로 결정했다. 점점 나에게 판단/결정권을 맡기는 추세로 갔다. 오히려 더, 책임감 때문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일은 훨씬 더 빨리 진행되는 장점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이 당신에게 주는 성취감이랄까 보람은. 외서 기획, 시인 등의 각각의 차원에서.

“①외서기획: 외서기획을 8년여 하다 보니, 선진적 정보와 깊이가 담긴 양질의 책은 영어권과 유럽(특히 독일과 프랑스) 그 다음으로 일본(조금 매뉴얼화 되었지만 실용성을 갖춘)에 거의 있다는 확신까지 들더라. 작년에 ‘바다의 인문학’ 시리즈를 기획하면서도 느낀 것인데 국내도서를 기획할 때에도 오히려 외국도서가 더 참고가 되었다.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를 하는 데는 번역 강국이었기 때문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해외의 양서를 국내에 소개하는 것도 출판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외서기획자는 일종의 중간매개자로서 이바지한다. 옛날에 아랫마을 갑순이와 윗마을 갑돌이가 천생연분이어도 중매쟁이가 없으면 맺어지기 힘들었다. 나의 고향에서는 중매에 성공하면 이불 한 채를 받더라.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도 중매를 두 번인가 선 게 기억나는데, 엄마는 중신을 서며 단지 ‘이불 한 채’만 욕심났을까? 혹시 다른 바람은 없었을까? 나도 양서를 중매하면 ‘이불 한 채(기획료)’를 받는다. 더 잘하면 ‘집 한 채’를 받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터. 중요한 것은 갑돌이와 갑순이가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은 중매장이에게도 큰 기쁨일 터……나의 외서 중매도 이런 정서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며, 독자의 가슴과 뇌에 무언가를 안겨주고 우리나라 지식민주주의라든지 지적 인프라에 이바지하면 나의 내면에서 ‘이불 한 채가 집 한 채로’ 커지더라.

②시인: 성취감? 보람? 아직은 없다. 28살 무렵 시를 접었지만 간혹 써보기도 하고, 하이쿠라든지 한시 같은 것도 끍적끍적 해보았다. 내가 시인인가? 지인들은 시인이라고 하긴 하는데, 시집 한 권도 없는 그런 시애호가도 시인인가? 시인이라면 시인이고 아니라면 아닐 터인데, 여하튼 비록 전력투구는 못하지만 마흔 너머 다시 시 쓰기는 온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만족감 혹은 힐링 차원 그러한 삶의 방식인 듯싶다. 20대 문청 시절에는 내가 한국시단의 큰 별이 되어야지, 라는 객기도 부리곤 했는데, 인생관이랄까 문학관이랄까 그런 방면에서의 생각 틀이 크게 변하게 맞다. 지금은 시를 읽는 게 즐겁고, ‘언젠가 시집 한 권 정도는 내고 싶다’라는 것, 그런 ‘소망’이 있을 뿐. 내 몸이 좋은 시를 못 쓰면 ‘시 애독자’로 만족하고.

③번역: 생계 문제로 인해 38살 무렵 대학원을 그만두며 독학을 해보기로 했다. 그때 번역을 하면 생계에 도움도 되고, 공부도 되겠다, 라는 지레짐작을 했다. 마흔 무렵 출판사 편집장을 그만두면서 번역을 시작했다. 처음에 출판사에서 의뢰하면 감지덕지했고, 거의가 하고 싶은 공부와 관련이 있어 즉 독학에 일조해 좋았다. 하지만 번역은 워낙 노동시간 대비 생산효율이 떨어지는 노동집약적 중도농이기 때문에 벌이가 영 시원치 않은 게 큰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교열, 보도자료 쓰기, 대필, 외서검토 등등 출판과 관련된 모든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게 되었다.

<장제스 평전> 번역서가 나올 때, 출판계 물정을 전혀 모르는 선배가 묻더라. 언제부터 장제스를 좋아했냐고?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출판사가 의뢰해 먹고 살려고 한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양서였고 한국에서 최초의 장제스 본격 평전을 소개한 데에 성취감이 있었지만……히틀러가 다시 필요해서 히틀러에 관한 책을 내는 게 아니라 히틀러가 다시 나오지 않기 위해 히틀러 연구서를 내는 게 출판의 본령이다. 만약 전자에 준한 책이라면 나는 그런 책을 기획하거나, 번역하거나, 그런 책을 내는 출판사에서 콩고물 한 줌 받지 않을 듯하고.

다시 말해 이른바 ‘전문번역가’에게 번역을 하는 까닭을 질문했는데 ‘생계 목적’ ‘지적 보람’ ‘지식 인프라 기여’ 이 중 하나에만 방점을 찍는다면 거짓말이거나 수준이 낮을 확률이 크다. 나는 위 세 가지 모두가 합일되는 지점을 찾으려고 애쓴다.

-일본어와 중국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하다고 들었다. 어떻게 배우게 되셨는지. 그리고 각각의 언어들은 하나의 책을 크로스체킹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는지.

“흔히 성문종합영어 세대가 그러하듯, 영어는 손(어휘 외우기)과 눈(독해)으로 배우고, 지금도 손과 눈만 영어를 할 줄 아니 능통하다고 할 수 없다.(그래서 대학 때부터 입과 귀로 배울 수 있는 영어권 연수를 가보는 게 소원 중에 하나였다). 수학을 잘 못하다보니 대학입시 때도, 언론사 시험 준비 3년여, 대학원 공부 때도 ‘손과 눈’으로 만 영어 공부했다.

그런데 일본어와 중국어는 완전 정반대로 공부했다. 일단 직장 때 모은 돈을 털어 어학연수부터 했으니 입(말하기)과 귀(듣기)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 손과 눈이 배웠다. 외국어는 입과 귀 그리고 손과 눈, 이런 순서로 배워야 ‘온몸으로 체화되어 자신의 언어’가 되는 것 같다. 어학연수 때 한국인과 놀지 않는다, 라는 원칙 외에는 특별한 공부비법은 없었는데 ‘사전활용법’ 만큼은 독특했다. 초급 때까지는 한영, 한일, 한중사전 등을 보았지만 중급 쯤 가까워지면 거의 보질 않고, ‘영일, 일영, 일중, 중일, 영중, 중영’ 사전 그리고 각 국가마다의 국어사전으로 공부했다. 귀→입→손→눈 순서로, 자신의 온 몸의 감각기관을 최대한 ‘외국어에만’ ‘장기지속적으로, 또한 집중적으로’ 노출시키고 느끼는 것, 이게 왕도라면 왕도인 듯하다.

하지만 번역은 이야기가 또 다른 듯하다. 한국 사람이라고 한국어 낱말 100%를 모르는 듯, 외국어도 모든 단어의 뜻을 외울 수도, 알 까닭도 없다. 외국어 낱말 뜻 모르면 사전 찾아보면 되고 사전에 없는 관용구나 저자거리 말은 해당 외국인에게 물어보면 된다. 번역의 관건(질)은 결국 어느 임계점에서 한국어 실력이 좌우한 듯하다. 아마도 60~70% 정도. 내가 평소에도 한국소설이나 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하는 까닭도 한국어 실력을 쌓기 위해서다. 며칠 전에 김주영 소설을 읽었는데 모르는 낱말이 너무 많이 나오더라. 연필로 동그라미 치고 몰아서 국어사전 찾아본다.

8년간의 외서기획 경험상 영미권이나 유럽권의 양서는, 1~2년 지나면 절반은 다른 언어권에서 출간되더라. 신간기획 때는 크로스체킹을 할 수 없긴 하지만, 웬만한 언어권에서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안 나온 양서 기획 때는 크로스체킹(특히 각국의 아마존 독자평, 외국신문과 블로거 서평 등 현지 반응)이 계약 판단을 할 때 큰 도움이 될뿐더러, 또한 책 출간 때 표지 문구 짜는 데 매우 요긴하다.”

-경향신문에서 시로 등단했다. 당시의 꿈은. 그리고 외서 기획을 하게 된 사연은.

외서기획을 하게 된 계기는 프리랜서하자 페이퍼로드, 민음사, 동녘, 실천문학사, 글항아리, 사계절 순으로 ‘출판사에서 부탁’해서 했다. 프리랜서로서는 생계에 크게 도움이 되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술 마시고 그 때까지 쓴 시가 다 들어있는 노트북을 잃어버렸다고 들었는데, 언제 이런 횡액을 당했나.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경위가 와전되었다. 원고지에 쓴 20편 정도의 시를 지인 3명과 술을 마시다 만취해 가방째 잃어버렸다. 처음엔 아까워 가슴이 쓰렸으나 (기억력을 살려 그것들을 다시 써 보려고도 했는데 실패) 이는 나의 불찰이고 엎질러진 물이니 과감하게 잊자, 하고 끝냈다. 산 자(시)는 죽은 자(시)를 위해 살아라, 고 죽은 자는 원하지 않는다. 시야 또 쓰면 되지 않은가.”

-탐욕스런 독서가라고 들었다. 당신 삶에서 독서가 수행하는 역할은. 직업의 차원과, 삶의 영역에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독서가’이기는 하다. 그런데 ‘잡식독서의 딜레마’라는 게 있다. 독서의 폭이 넓긴 하지만, 깊이가 얇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오류’라고도 하겠다. 많이 아는 것 같으나 실상은 깊이가 없으니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제너럴리스트 독서가의 아픔이랄까. 2001년 도쿄에서 다치바다 다카시(논픽션 작가)를 인터뷰하면서 배운 바인데, 잡식독서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선 ‘스페셜리스트의 몰입’이 필요하다. 즉 한 시기를 잡아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 ‘다면적’으로 파야 깊이가 채워진다는 말이다.

가령 공부하고 싶은 분야(혹은 주제)와 관련된 양질의 ‘(고급)학술서-(중급)대중교양서-(초급)입문서-(타 분야 연계) 관련도서’를 적어도 7~8권 정도는 구입해, 쉬운 책부터 한 권씩 완독을 해보는 것도 좋지만, 다치바다 다카시는 그럴 필요 없이 ‘목차’를 보고 구미가 당기는 곳, 정복하기 쉬운 곳, 깊이를 채워줄 것 같은 곳, 핵심이 정리된 곳을 추려서 읽으면 단기간에 최대한의 깊이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몇 번 시도해보았는데 확실히 잡식독서의 딜레마를 어느 정도는 넘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어느 한 분야의 고전이나 당대 최고의 명저는 완독하는 게 필수이고.

탐욕스런 독서가? 글쎄? 탐욕스런 독서가가 되려면 우선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신간은 도서관에 있지도 않고. 읽은 양서는 소장하고 싶고. 나의 경우엔 책을 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었다고 할까? 책을 집중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특별한’ 시기가 있었다. 우선 대학생 때부터 학생식당 설거지, 호프집 서빙, 과외, 노가다 등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단기적으로 해보았는데 장기간 한 것은 서점 직원이었다. 성균관대 앞 서점 풀무질에서 군대를 전후로 4년 가까이 밤에 일했다. 주로 손님이 가끔씩 오는 2층 담당이었는데, 한가하니 책 읽는 게 소일거리였고, 나만 복사해가도 되는 특별대우도 받고, 오시는 손님은 태반이 ‘이 책 어때요’라고 물으니 목차라도 읽고 다 읽은 양 주접떨며 호객 행위 했다.

언론사에서는 주로 출판·문학·문화 담당을 했고, 유학생활 3년이 끝나고는 2년간 논술강사를 했는데 담당이 ‘논술 책’ 써주는 거였기에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다.(당시에 조선·중앙·동아일보 논술 지면에도 대필이든 기명이든 논술과 책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그리고는 출판계에서 편집장부터 시작하고 이후에는 출판기획자를 했으니, 책을 안 읽으면 굶는데 어찌 책을 멀리 할 수 있었겠는가. 독서가 생계의 방편이었다.

삶의 영역에서 독서가 수행하는 역할? 글쎄? 독서가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이런 물음인가?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아무런 ‘걱정 없이’ 책을 맘껏 사볼 수 있고, 두 달 쯤 책만 읽어도 마누라가 민생경제학적 잔소리를 안 한다면 확실히 삶의 질은 몇 백배 높아질 듯싶다. 수많은 미생들은 누구나 그러할 게다.

나는 ‘독서의 안팎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독서의 안(양적 측면)’은 ‘책을 읽는 순간―지식 습득’이다. ‘독서의 밖(질적 측면)’은 ‘책을 읽고 난 뒤의 독서 행위―사색과 성찰, 요약 메모나 독후감이나 서평, 다른 장르로의 진화적 글쓰기, 지행합일(知行合一)같은 삶의 가치로 승화’이다. 상대적으로 후자 쪽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독서가 완성된다. 전자에만 머문다면 책상물림의 절름발이 독서다. 나에게 묻는다. 독서로 인한 삶의 질이 만족스러운가? 절반만!”

-묻지 않은 질문 중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필작가 생계가 걱정되긴 하지만, 우리나라 대필문화는 조정되어야 한다. 외국처럼 ‘구술정리자’를 표기하던지.

인간끼리의 모든 갈등은 거반 이문(利文) 싸움이며, 문명의 이기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우리는 책이나 스마트폰은 없어도 생존할 수 있지만, 쌀이나 농사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걸 실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를 출판시장에 빗대보자. 두서없더라도 솔직하게.

출판시장에서 벼(책)를 심고 수확하는 농사꾼(1차생산자)은 저자(준 1차생산자는 번역가)다. 벼가 맺은 쌀(이득)은 ‘1차생산자-2차생산자(출판사)-유통업자(서점)’가 나눠먹는다. 개인적으로는 (대형)유통업자의 몫이 상대적으로 커 형평성에 조금 어긋나지 않나하고 생각한다. 출판의 경우 중국만 해도 저자 인세가 14~15%는 된다. 저자 인세 10%. 이미 한국의 문화전통이니 그냥 넘어가고 개인적으론 그다지 불만이 크지도 않다. 단 초기투자를 오로지 저자의 부담으로만 안기는 것, 그리고 인세의 불투명성은 꼭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번역가 대우는 더 열악하다. 번역은 시쳇말로 막노동인데, 아마 하루 8시간 일하는 일용직노동자보다 더 먹고 살기 힘들 것이다.(번역가는 하루 노동시간을 최대한 늘려 수익률을 상대적으로 벌충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경제적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번역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일천한 게 (구미와 일본이라는)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적 특수상황이다.

가령 교수님이나 외국물 먹은 학자들이 번역 그까짓 거, 공부깨나 하면 누구나 하는 거지라는, 또한 지식인 전업주부의 맞벌이용 아르바이트쯤으로나 여기는 요상한 관념이 강하다. 번역이야말로 외국어와 한국어 실력, 엉덩이의 끈기, 의미해석에 대한 정확한 직관력과 통찰력이 종합적으로 필요한 지식노동이고, 번역자는 지식전파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지식민주주의의 선봉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양서는 선진국에 많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만약 이에 동의한다면, 번역가에 대한 경제적 대우 개선과 번역에 대한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위상 제고가 다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제반 수준은 더욱더 더디게 높아질 거라고 장담한다.

더불어 출판사 입장도 이해한다. 양서를 내면 적어도 절반이라도 손익분기점은 서너 달 안에 넘어가주는 독서시장이 형성되어야, 아닌 말로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속담처럼, 저자에 대한 초기투자도 뒷받침 해주고, 번역가에게 번역료도 합리적으로 챙겨줄 터인데, 한국 사람들 술값과 화장품값, 커피 값은 안 아껴도 책값은 너무나 아끼며 살다보니 ‘⑴저자/번역가의 빈곤-⑵출판사의 영세/후진적 경영-⑶(대형)유통업자의 갑질’이 악순환 된다. 한국 사람들이 책을 적어도 한 달에 세 권 가량씩만 사주고 읽어주면 (1) (2)번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국가 정책적 독서진흥은 차선책이고, 역시 개인의 자발적 독서문화가 최선책이 아닐까?)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다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들이 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미 아놀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논증했듯이, 메디치가와 같은 ‘패트론(후원자) 문화’ 덕분이었는데, 한국의 출판사도 1차생산자의 탄탄한 패트론이 되려는 열정과 양심, 당연히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한국의 관행은, 어느 분야든 1차생산자의 몫이 터무니없이 낮은 경우가 비리비재하다. 출판사가 아무리 많은 들, 서점이 제아무리 인테리어를 친환경적으로 꾸민들, 드론이 책 배달을 한들, 인공지능이 손익분기점에 적절한 책값과 서점 공급률을 책정한들, 농사꾼(저자와 번역가)들이 죽어나가 쌀을 생산하지 못하는 판국이라면, 그 언젠가는 모두가 굶어죽을 운명이란 건 당연지사 아닌가!

밥(책)이 없어도 고기(스마트폰)가 있으니, 로봇이 농사를 짓는(책을 쓰는) 세월이 오니 문제없다고? 글쎄? 성인병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고, 인공지능이 과연 ‘제 자식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심는 심정으로 땅을 파는’(영혼을 걸고 글을 쓰는) 농사꾼(저자)의 마음을 가지는 날이 올까?”

-가장 성취감이 컸던 책 5권과 그 이유 한줄 평. 기획한 양서 중에서. 

*기획서(글항아리만):

1)<쇼와 육군 연구昭和陸軍の研究>(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지음)

⇨증언으로 일제 육군의 착오 분석. 일본이라는 국가시스템의 ‘무책임성’ 오류를 논박. 동아시아 평화의 ‘잃어버린 고리’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책임’인가라는 질문의 연쇄현상 일어남.

2)<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Year Zero:A History of 1945) (미국 도서)

⇨한반도에 부정성과 긍정성이 함께한, 역사적 ‘특이점’ 같은 1945년이기에 기획. 아(我)측이라고 우상화하거나 절대 무오류화 하면 진실은 땅에 묻히기 십상이라는 깨달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진리다”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오름.

3)<창(槍): 시인, 색마 그리고 전쟁의 전도사>(영국 도서)

The Pike: Gabrie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 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무솔리니의 정신적 지주이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였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평전. 그의 삶을 통해, 인류사에서는, 탐미주의(혹은 데카당스) 열정과 파시즘 광기의 위험한 쾌락의 동거 가능성이 언제든 존재함을 엿보고 소름이 돋음.

4)<공자사전孔子辭典>(푸페이룽傅佩榮 지음) (대만 도서)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의 ‘논어 대백과사전’. 나를 비롯해 논어 독자들의 뇌를 춘추시대 국가/사건/인물/전장제도/철학사상/고사성어 별로 ‘마인드맵’화. 드디어 논어공부를 엑셀 프로그램화해 가능.

5)<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대량 학살자의 반성하지 않는 삶>(독일 도서)

Eichmann vor Jerusalem: Das unbehelligte Leben eines Massenmörders Taschenbuch (베티나 스탕네트 Bettina Stangneth 지음)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내면에 ‘악의 평범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전체주의와 악의 철학에 대한 논쟁 수준을 높임.

*번역서

<논어와 주판>(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페이퍼로드) (일본)

⇨기획에서 번역까지. 공자께서는 덕성뿐 아니라 생활력도 중시했다는 논어의 재발견.

<사기영선>(사마천/반고 지음, 일빛) (한국 고전)

⇨정조가 가려 뽑은 사기와 한서의 백미. 3년 간 옮기느라 생계가 고달팠으나 고문 실력이 늘고 모출판사 사기 번역 오류 20여 군데를 바로잡아줘 뿌듯함.

<언지록言志錄>(사토 잇사이 지음, 알렙)(일본 고전),

⇨완역했으나 축약본으로 나와 서운함. 낮에는 주자학, 밤에는 양명학을 공부한 ‘일본의 율곡’을 통해 이론성과 실용성을 함께 중시하는 일본의 장점을 배움.

<쟁경>(자오촨둥 지음)(중국 도서)

⇨중국의 논‧구술 역사를 한 권의 흥미진진한 시나리오처럼 총정리. 논리력과 말발이 세지고 싶거든 읽어보시라.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지음) (영국 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주인공이었으나 논픽션에서 역사적 자료 취합과 정리, 팩트의 실증성이 얼마나 중요한 지 실감.

<늙어갈 용기>(기시미 이치로 지음) (일본 도서)

⇨아픔, 늙어갊,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때 옮김. 자기계발서도 인문·사회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