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은 생존에 불리"… 육식 거미, 채식도 한다

봄날 활짝 핀 꽃 사이로 연신 꿀벌들이 드나든다. 얼마나 급했는지 한 마리는 온몸에 꽃가루가 잔뜩 달라붙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신기하게도 날개가 없다. 다리도 꿀벌보다 두 개 더 많은 여덟 개다. 바로 곤충 잡는 귀신, 깡충거미다. 숲과 들에서 육식(肉食)을 버리고 꽃가루와 꿀로 식성을 바꾼 채식주의자 거미들의 봄나들이가 한창이다.

◇단물 두고 개미와 경쟁

깡충거밋과(Salticidae)는 거미 중 가장 종이 많다. 5000여 종이나 된다. 손톱만 한 작은 몸집에 풀밭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게 여간 귀엽지 않지만 곤충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머리 가운데 마치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커다란 두 눈을 비롯해 눈 8개로 먹이를 찾아내 사정없이 공격한다. 그런 곤충 사냥꾼 깡충거미가 육식을 버렸다는 것이다.

스위스 바젤대 마틴 나이필러 교수는 미국 브랜다이스대, 영국 카디프대 연구진과 함께 최근 국제 학술지 '거미학 저널'에 "지금까지 발표된 거미 관련 학술 논문을 분석해 채식 거미에 대한 기록 95건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채식 거미의 60%는 깡충거밋과(科)에 속했다. 그리고 채식 식단의 75%는 꿀이었다. 채식 거미 대부분은 열대 지방에 산다. 식물이 꿀을 잘 분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꿀벌이 찾는 꿀은 '꽃 안 꿀샘(floral nectary)'에 있다. 이에 비해 거미가 찾는 꿀은 '꽃 밖 꿀샘(extrafloral nectary)'에 있다. 열대지방에 있는 식물을 보면 줄기에 마치 혹처럼 툭 튀어나온 구조를 볼 수 있다. 바로 단물이 흘러나오는 꽃 밖 꿀샘이다.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은 "꽃 밖 꿀샘은 꽃가루받이와는 상관없이 '보디가드' 개미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밝혔다. 개미는 꽃 밖 꿀샘에서 단물을 얻고 대신 식물을 위협하는 곤충이나 초식동물을 물리친다.

거미는 이 꿀을 얻기 위해 개미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곤충 잡는 사냥꾼 거미라 해도 개미가 떼로 덤비면 위험하다. 개미들이 꿀샘에 모여 있으면 거미는 근처에서 가만히 지켜만 본다. 단물에 물린 개미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전광석화같이 달려들어 허겁지겁 단물을 마신다. 페카미아(Peckhamia)속(屬) 깡충거미는 개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아예 겉모습까지 개미와 닮게 진화했다.

◇생존 위해 食性 다양화

거미의 채식 식단은 다양하다.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에 사는 한 거미는 망고 잎을 씹어 그 안의 수액을 먹는다. 단단한 요리도 있다. 중앙아메리카에 사는 '바기라 키플링(Bagheera kipling)'이란 학명(學名)의 깡충거미는 아카시 이파리 끝에 달린 노란 벨트체(體·beltian body)를 즐겨 먹는다. 벨트체에는 꽃 밖 꿀샘에서 얻기 어려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 거미는 마치 육식을 할 때처럼 소화액으로 단단한 벨트체를 녹여 액체로 만들고 흡입한다. 꽃가루도 단단한 채식 요리다. 하지만 거미에게는 꽃가루의 껍질을 녹일 효소가 없다. 거미는 꽃가루에 구멍을 내서 안쪽 영양분을 먹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채식 거미라고 육식의 본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바기라 키플링을 제외한 대부분의 채식 거미는 채식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실험실에서 오로지 꿀과 꽃가루 같은 채식만 줬더니 다른 거미보다 성장이 더디고 허물 벗기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거미가 완전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은 식물이 만든 고도의 전략 때문인지 모른다.

꽃 안 꿀샘에서 나오는 단물에는 당분은 물론 단백질도 풍부하다. 이에 비해 개미가 먹는 꽃 밖 꿀샘의 단물에는 단백질이 거의 없다. 개미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곤충을 잡아먹어야 한다. 식물은 개미가 배가 불러 일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영양분까지 조절한 것이다. 거미 역시 단물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바기라 거미가 거의 채식만으로 사는 것은 당분과 함께 단백질, 지방이 풍부한 벨트체를 즐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채식의 가치는 줄지 않는다. 나이필러 교수는 "채식은 먹잇감인 곤충이 부족한 시기에 거미가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했다. 게다가 채식은 육식만 할 때 발생하는 영양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야생에서도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