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같고, 바로 숨기는 TV

수년간 TV는 치열한 '두께 전쟁'을 치렀다. '얇고 넓게'가 지상 과제였다. 이 불문율에 도전장을 낸 TV가 등장했다. 날렵한 TV들 앞에 보란 듯 나무 액자만큼 두툼한 프레임을 달고서.

이 TV는 벽엔 아예 못 건다. 대신 1970~80년대 '자바라 TV'를 연상케 하는 가는 다리 4개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게 했다. 삼성전자가 이번 주 국내 출시한 '세리프 TV'다. 이 '역발상 TV'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 로낭(45)·에르완(40) 부훌렉 형제가 디자인했다. 가구로는 세계 정상에 이름 올렸지만, 가전은 한 번도 디자인한 적 없는 이들이다.

"저희 집 TV요? 15년 전에 없앴어요. TV에 내 삶을 끼워넣기 싫었거든요. 아내, 두 딸(두 살, 여덟 살)과는 태블릿PC 4대로 영화를 봐요. 제가 디자인한 TV는 들여놓을까 고민인데, 아내는 아직 이르다 말리네요(웃음)." 지난 30일 서울 코엑스 리빙디자인페어 삼성 부스에서 만난 에르완 부훌렉은 '역발상 TV'의 비결은 "TV와 친하지 않아 TV를 순수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전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는 것, 그래서 가전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삼성이 부훌렉 형제를 선택한 이유였다.

이 TV, 옆에서 보면 알파벳 대문자 I자 같다. '세리프'(문자 끝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글꼴)란 이름은 이 형태에서 왔다. 뒷면엔 천을 덧대 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찻주전자를 디자인한다고 치죠. 모든 방향을 염두에 둬요. TV도 찻주전자처럼 어디에나 둘 수 있고, 우리 삶 일부로 녹이려면 입체적인 사물로 봐야 해요. 모니터 앞만 중요한 게 아니라 옆도, 위도, 뒤도 중요하죠."

두 형제의 고민은 뭐였을까. "'잘 꺼지는 TV'였어요. 보기 싫을 때 바로 숨길 수 있는 TV 말이죠." 기술적인 시각에서 '최대한 빨리 켜지게'하려는 고정관념을 뒤통수친다. '커튼 모드'라는 기능이 탑재된 배경이다. TV를 켠 상태에서 커튼 모드를 누르면 은은한 커튼 무늬가 나오며 화면이 가려진다.

"삶은 이동(Life is movement)." 디자인할 때 늘 염두에 두는 신념이 벽걸이 TV 거부로 이어졌다. "왜 인간에게도, 벽에도 고통스러운 걸 해야 할까요. 한 번 박아버리면 이사 가기 전엔 옮기지도 못하게."

형제는 파리 11구에서 직원 8명의 아담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형 로낭은 "사무실을 지켜야 해서" 이번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세계적 전자회사 삼성과의 협업은 모험이었다. "3년 6개월 전 삼성 직원 두 명이 왔어요. '삼성에서 왔고, TV를 만든다'는 얘기만 했지요. 몇 달 뒤 다시 와서 우리에게 TV 디자인을 맡겼어요. 그렇게 거대한 회사가 왜 우리를? 놀라웠지요." 그는 "비트라, 알레시 같은 회사와 일할 땐 늘 대표와 만나 제품 얘기를 했는데 삼성 수장은 아직 못 만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