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가짜일지라도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1953년 개봉한 영화 '로마의 휴일'은 세계적인 흥행을 거뒀고, 오드리 햅번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나리오를 쓴 이언 맥렐런 헌터도 각본상을 받았다. 수상자인 헌터보다 훨씬 더 흥분한 이는 TV로 시상식을 지켜본 돌턴 트럼보다. '로마의 휴일'의 진짜 작가가 바로 트럼보이다.

영화 '트럼보'는 1940년대 정치 성향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했던 작가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의 이야기다. 1947년 9월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는 감독, 작가, 배우 등 41명의 증인을 청문회에 소환했다.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트럼보와 그의 동료 작가들은 이 자리에서 증언을 거부했고, 이 무리는 '할리우드 10'으로 낙인이 찍혀 일거리를 잃는다. 의회 모독죄로 감옥에 다녀온 그는 생계를 위해 가명으로 B급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오스틴 파워'와 '미트 페어런츠'와 같은 코미디 영화를 주로 연출한 제이 로치 감독은 트럼보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웅담을 들려줄 생각이 없다. 감옥에 다녀온 뒤 트럼보는 글을 쓸 때 행패에 가까운 짜증을 부렸고,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폭군처럼 군림했다. 벌거벗은 채 욕조에 드러누워 타자기를 두드릴 땐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회가 어떻게 한 인간을 광인에 가깝게 몰아갔는지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트럼보가 사용했던 가명은 총 11개. 시나리오 요청이 너무 많아서 감옥을 함께 갔다온 동료들에게 일감을 나눠줬다. 트럼보와 동료들은 밀주라도 만들어 파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은밀하게 거래한다. 이 과정이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처럼 짜릿하다. 7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