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립스틱男·삭발女, 그도 그녀도 아닌…

걸 그룹 f(x) 멤버인 엠버(24)는 지난달 말 솔로곡 '보더스(경계)'를 내면서 소년 같은 모습으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 목덜미가 다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자른 머리에 헐렁한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여성스러운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안달하는 걸 그룹 사이에서 그는 줄곧 이런 모습이었다. 데뷔 때 사람들은 "엠버가 남자냐, 여자냐"고 궁금증을 가졌을 정도.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10~20대 여성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젠더리스(genderless)'가 '제3의 성(性)'으로 떠오르고 있다. 태어날 때 주어진 성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그(he)' '그녀(she)'처럼 성별을 드러내는 지시대명사를 없애고,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인간을 남성이나 여성 둘 중 하나로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이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했다.

젠더리스는 90년대 'X세대'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니섹스'와는 다른 개념이다. 패션으로 보자면, 유니섹스는 남자나 여자나 무채색에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는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드러나지 않는 옷이었고, 주로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다는 개념으로 쓰였다. 젠더리스는 성별에 관계없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넘나든다. 남자가 치마를 입고, 여자가 턱시도를 입는다.

젠더리스에 가장 발 빠르게 반응한 것은 패션계다. 올해의 화두가 젠더리스다. 지난해부터 국내외 패션쇼에서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남성 모델과 두상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삭발을 한 여성 모델이 등장했다. 구찌의 올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는 목에 분홍 리본을 묶은 블라우스가 나오고, 아크네, J.W.앤더슨의 남성복에는 원피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남성 정장을 입으려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국내 백화점의 생로랑 남성복이나 디올 옴므 매장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찾는 여성 고객들이 생겨났다. 영국 백화점 셀프리지는 아예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없앤 의류 브랜드인 '아젠더(Agender)'를 만들었다. 버버리도 남녀 따로 치르던 패션쇼를 하나로 통합했다.

성적 구분이 없는 패션으로 국내에서 인기를 끈 연예인은 지드래곤(28)이다. 그는 여성용 트위드 재킷에 진주 목걸이를 한 채 샤넬 패션쇼에 나타나는가 하면, 치마를 입고서 패션 화보에 등장한다. 최근 패셔니스타로 떠오른 '응답하라 1988'의 이동휘도 분홍색 옷을 자주 입어서 '핑크보이'로 유명하다. 10~20대 사이에서 이들은 '여자처럼 입는 남자'가 아니라 '옷을 잘 입는 남자'다.

길거리 패션 사진을 찍으면서 시각사회학을 연구하는 마이클 허트 고려대 교수는 "길거리 패션을 연구하면서 한국 젊은 세대가 성(性) 정체성에 대해 갖는 관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가 있었다면, 최근에는 거기에 저항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그가 최근 서울에서 찍은 사진에는 립스틱을 바르고 눈 화장을 한 남자와 삭발을 한 채 펑퍼짐한 재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패션의 유행은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을 반영한다. 앞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변신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性)역할이란 게 필요한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의 고부가가치 노동 시장에서는 더는 이런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전형적인 남성성이나 여성성보다는 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이나 취향, 자질을 드러내야 하는 영역이 훨씬 많다. 특히 창의성이 강조되는 분야가 늘어날수록 기존의 성역할에 충실한 인간상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엠버가 지난해 SNS에 남긴 글은 새로운 세대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전 여자와 남자가 어떤 한 가지 외양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