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국 희생 기억하고 민주주의 가치 깨닫길"

드럼통 위에서 굽고 있는 빵을 바라보는 병사들 입가에 침이 흐를 듯하다. 갓 일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의 젊은이는 텐트 앞에 철모를 벗어놓고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지 면도에 열심이다. 선글라스를 쓴 듬직한 덩치의 사내와 삼베옷에 고무신을 신은 한국 젊은이가 나란히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전쟁 중이라는 게 실감 안 날 정도로 여유로운 사진 속 주인공들은 6·25 전쟁 때 1만명 넘게 파병돼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그리스군인들이다.

이 사진들을 비롯해 6·25 당시 그리스 장병들의 일상이 담긴 사진 200여 점과 메달, 빛바랜 신문기사와 메모 등 손때 묻은 기증품이 지난 5일 부산 대연동 유엔평화기념관에 도착했다. 지난해 8월 '유엔평화기념관에서 6·25 관련 기증품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은 주한 그리스 대사관·그리스 국방부가 전국 각지의 참전용사들을 수소문해 노병(老兵)들로부터 받아온 것이다. 까마득한 군 후배인 동아시아 국방무관 프락시텔리스 구니스 대령이 근무지인 중국 베이징에서 서울로 날아와 지난 5일 대선배들의 기증품을 전달했다.

짙은 남색 줄의 그리스 정부 메달, 하늘색 줄의 유엔 메달, 누렇게 빛바랜 그리스 신문 스크랩, '아테네로부터 자유의 횃불은 타오르고'라는 제목의 한국 신문기사 등과 사진 200여 점, 동영상이 담긴 디스크 등도 전달됐다. 파일에 담긴 사진 속 그리스군 진중(陣中) 풍경은 '한국 속 작은 아테네' 같다. 휑한 민둥산 뒤로 쓰러질 듯한 초가 마당에 임시로 꾸린 정교회 성당에 모여든 장병들이 군종사제 집전으로 엄숙히 성찬예배를 보는가 하면, 부활절을 맞아 고향에서처럼 양고기를 통으로 굽는다. 노래하며 장기자랑을 하거나 여가시간에 '군대스리가(군대에서 하는 축구)'를 하는 모습은 요즘 군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여유로움만 묻어나는 건 아니다. 목숨 걸고 포연 속으로 뛰어드는 전투병들, 첫 전사자 시신을 실은 군용트럭과 마주한 군종사제, 국기와 꽃으로 두른 관에 누워 고향 행을 기다리고 있는 전사자 유해 등 삶과 죽음의 순간이 담겨 있다. 6·25 참전 그리스군 중 187명이 전사하고 617명이 다쳤다.

유엔평화기념관 관계자는 "참전국 자료들이 영국·미국 등 특정국가에 치우쳐 있는 점이 고민이었는데, 이번에 그리스에서 보내준 '선물'은 당시 병사들의 소소한 일상까지 세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고 반겼다. 그리스 노병들이 기증품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은 60년 넘게 이어지는 전우애 때문이기도 하다. 1000명의 생존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참전자료 수집과 기념사업 등을 활발히 이어가며 끈끈한 의리를 과시하고 있다는 게 주한 그리스 대사관 얘기다.

이번에 도착한 사진 자료의 상당수는 6·25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한 코스타디노스 케브가스씨의 소장품이다. 케브가스씨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룰 수 있게 해줬던 우방국의 희생을 알고,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주한 그리스 대사관 관계자들이 전했다. 그리스는 추가로 전국의 참전용사 및 유족들로부터 기증품을 더 받고 있다. 이 자료는 아테네에서 외교행낭에 담겨 다음 달쯤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