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로도 안 보이는 '깨알 약품설명서'

"돋보기를 써도 안 보인다니까!"

서울 중구 다산경로당에 모여 있던 한 어르신은 '포장에 적힌 용법·용량을 읽어 달라'며 약품들을 건넨 본지 취재진의 청에 대뜸 이런 반응을 보였다. 다른 이들도 대체로 미간을 찌푸린 채 읽어보려다 "이걸 어찌 읽겠어"하며 이내 포기했다.

의약품 포장지 등에 쓰여 있는 깨알 글씨 약품설명서가 오·남용과 부작용을 부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약품 설명이 전문용어로 가득해 연령과 관계없이 일반 소비자가 증상·용법에 맞게 이용하기엔 불친절하다는 비판도 많다.

본지가 편의점 등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등 7종을 골라 지난 22일 경로당 70~80대 어르신 20명에게 보여준 결과, '설명서 글씨를 읽을 수 있다'고 답한 이는 '제로(0)'였다.

노안이 시작되는 40대부터 약 포장 '깨알 글씨' 보기는 불편해진다. 정인숙 부산대 간호대 교수 등이 대한보건협회 학회지('대한보건연구' 2014년 10월)에 게재한 '일반의약품 포장 기재 사항의 글자 크기별 가독성' 연구 결과, 약 포장에 많이 쓰이는 글자 크기(6포인트)로 20~30대 가독성은 80.4점(100점 만점)에서, 40대(69.6점), 50대(32.6점), 60대 (42.5점), 70대(6.7점)로 계속 내려앉았다. 성인 400명 대상 조사 결과다. "20~30대 인구 비율은 전체 성인 인구의 40%에 불과해, 60% 성인이 의약품을 제대로 쓰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뜻"이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특히 약 복용이 잦은 노인층에선 약품 설명서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인향 영남대 약학대학 교수팀은 65세 이상 노인층에서 해열·진통제 등의 설명서 이해도가 42% 수준에 그쳤다고 최근 밝혔다. 40~50대 이해도(69%)보다 27%포인트 낮은 수치다.

'암호문' 같은 어려운 용어도 이해도를 떨어뜨린다. 22일 취재진이 '급성 전신성 발진성 농포증(고름물집증)이 생길 수 있다'는 약 경고 문구 이해 여부를 20~70대 연령층에게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물어본 결과 "모르겠다"는 답변이 대다수였다. 이혜연 약사의 논문 '일반의약품 어휘의 난이도 분석'(2014)에 따르면, 약품 설명서의 용법·용량, 효능·효과, 주의 사항에 쓰인 어휘 81.3%가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언어(국립국어원 한국어 학습용 어휘목록 기준)였다. 이 약사는 "약 오·남용과 부작용을 막으려면 설명서를 쉽게 바꿔야 한다"고 했다.

편의점 등에서 파는 상비약도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게 아니어서 약품 설명서를 쉽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서울 지역 한 약사는 "술 마시고 임의로 두통약을 사먹은 뒤 속쓰림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흔히 찾아온다"고 했다. 이인향 영남대 교수는 "약국에서 복약 지시를 귀담아듣지 않거나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고려하면 약품 설명서를 더 쉽게 써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현행 약품 설명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느끼고 개선책 마련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식약처는 2013년 '의약품 표시 등에 관한 규정' 개정고시를 통해 글씨도 키우고 쉬운 용어를 쓰도록 권고했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규정상 '약 용기·포장 글자 크기 6포인트 이상'으로 정해뒀지만, 약품 겉포장에 써야 할 기재 사항이 많아 하한선인 6포인트, 즉 쌀알 한톨보다도 작은 글자 크기를 쓰는 경우가 많다. 제약 업체 관계자는 "규정에 따라 설명서에 담아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정인숙 부산대 교수는 "약 겉포장 기재 항목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꼭 알아야 하는 용법·용량, 주의 사항의 글자 크기를 키우는 식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올 하반기부터 그림 문자 등을 활용한 약품 설명 방식을 시범 도입할 계획이다. 술 마신 뒤 먹으면 안 되는 약에는 술병 그림과 함께 '×' 표시를 하는 식이다. 김춘래 식약처 의약품관리총괄과장은 "그림 문자 도입에 따른 효과를 평가해 내년부터 대폭 확대 시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