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5.04 10:49

연극 '늘근도둑이야기' 배우 박철민 인터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1~2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매우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쉽게 변하는 세상에서 26년간 변함없이 연극계를 지켜온 연극 한 편이 있다. 그리고 15년 동안 꾸준하게 그 연극에 출연해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선사해주는 배우가 있다. 연극 늘근도둑이야기와 배우 박철민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돼버렸다. 박철민 자신도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를 어느덧 많은 정이 쌓인 '아내' 같다고 표현하였다.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26년 동안 꾸준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배우 박철민과의 인터뷰에서 그 인기의 비결을 알 수 있었다.


Interview

Q. 영화 약장수에서 악역을 맡으면서 연기 변신을 시도하셨는데 어떠셨어요?

사실 악역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영화 혈의 누에서 네 번째로 죽는 악역을 맡았었죠. 다만 아쉬웠던 건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저런 표정, 눈빛, 악랄함이 몸에서 나올 수 있구나' 하면서 신이 났지만, 단선적인 악역이면서 사연이 없고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역이었어요. 거기서 악역에 대한 답답함과 갈증이 있었어요. 반면, 영화 약장수에서는 설득력 있는 악역을 맡았던 거 같아요. 먹고 살다 보면 저렇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악랄해질 수 있잖아요. 돈을 위해서라면 치졸하고 더러워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난 평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다', 제가 맡은 인물 철중에 '동의가 간다', '당연히 그럴 수 있어서 더 이입이 잘됐었다', '더 미워 보였었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Q. 악역이 본인에게 잘 맞던가요?

저는 솔직히 악역을 많이 하진 못했지만, 제가 보기엔 악역이 훨씬 잘 맞는 거 같아요. 저 스스로 '박철민이 착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악한 사람이라고 답할 거 같아요. 제 기본 성격이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악역이 훨씬 더 잘 맞고 원래 입었던 옷 같아요. 특히 약장수의 악역은 너무나 신났어요. 악역을 하면서도 큰 고민 없이 신나게 연기했죠. '이 악랄한 눈빛과 표정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기도 하고, 대사를 하다 보면 나 스스로 흥분하고 설레서 역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착한 역이나 신나는 역, 감초 역을 할 때의 즐거움이 있지만, 악역은 나에게 훨씬 잘 맞는 옷이고, 제가 더 입고 싶은 옷인 거 같아요.

Q. 인생에 없어선 안 될 세 가지로 연기, 야구, 요가를 꼽으셨어요. 야구와 요가 얘기를 해주세요.

야구는 중학교 때 연기만큼이나 하고 싶었어요. 사실 어린 시절에는 하고 싶은 게 한가지만은 아니잖아요. 제가 광주 동성중학교를 다녔는데 야구부가 있었어요. 야구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즐겼고, 그러다 보니 더 많이 하고 싶고 매일 하고 싶더라고요. 야구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버님에게 상의했다가 정말 많이 혼났어요. 그래서 그 꿈은 접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야구를 좋아해서 매일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니까요. 그래서 그 꿈을 구석진 곳에 두고 있다가 십여 년 전에 순수 아마추어 야구단에 들어가서 다시 야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맞아 이래서 내가 야구를 좋아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야구만이 갖는 드라마 같은 매력, 모든 기록이 있고 인생과 비슷한 역전의 형식들이 많잖아요. 야구는 정말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요가는 십여 년 전에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하다가 쓰러진 다음부터 하게 됐어요. 그때 담배도 술도 다 끊었죠. 안 가본 병원이 없는 거 같아요. 모두 한결같이 스트레칭을 하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이 병은 스트레칭이 굉장히 큰 효과를 볼 것이다'라는 조언을 받았어요.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는데 하고 나니까 매우 좋더라고요. 한 석 달은 너무 힘들고 지치더라고요. 잠도 안 오고 내 몸이 몸살이 나서 이기지 못했다가 석 달, 넉 달이 지나면서는 '아, 내가 나한테 해주는 소중한 안마고 서비스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학원을 못 가도 집에서 혼자서 하고 있어요.

Q. 연극과 뮤지컬을 겸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뮤지컬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가요?

저도 두세 번 뮤지컬 제안을 받았는데 워낙 제가 음치에 박치다 보니 엄두도 못 내요. 예전에 '노동의 새벽'이라는 연극에서 노래를 한 번 불렀어요. 음정, 박자를 맞추기 힘드니까 아주 곤욕스러웠어요. 그래서 늘 고사하고 있어요. 어떤 뮤지컬에서는 노래가 없는 역을 주겠다고 했는데 노래가 중심인 극에서 노래가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뮤지컬은 아쉽지만, 출연하지 못하고 있어요.

Q. 26년간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연극 늘근도둑이야기에 15년 동안 출연하고 있는데 간단하게 연극 늘근도둑이야기의 소개를 해주세요.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던 늙은이가 특사가 되어 감형되어 나오게 됐고, 사회에 적응 못 하고 다시 도둑질하기 위해서 어딘가를 들어가요. 그런데 하필 들어간 곳이 대기업 회장 부인이 운영하는 미술관이었죠. 거기에서 여러 가지 해프닝들이 벌어지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생겨나죠. 또다시 늙은이들이 경찰서로 잡혀가고 형사와의 대화를 통해 사회와 사회 현상을 희롱하면서 벌어지는 상황 코미디예요.

Q. 늘근도둑이야기가 아직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틀 자체가 기본적으로 재밌어요. 늙은 도둑 두 명이 감옥에서 나왔는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죠. 그래서 다시 도둑질하러 가는데 하필 거기가 재벌의 미술관이죠. 그런 어떤 설정 자체가 우스꽝스럽잖아요. 우스꽝스러운 틀에서 나온 코미디들이 89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까지 오면서 여러 가지가 변했어요. 8·90년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사이였다면 지금은 완전 디지털 시대잖아요. 엄청나게 변화된 세상에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고 호흡을 같이하려고 했던 노력이 관객들에게 인정받지 않았나 싶어요. 늘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지면 배우들끼리 함께 고민하고 모여서 토론하기도 해요. 알파고와 이세돌이 화제가 됐을 땐 '이걸 우리 연극에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도 했었죠. 30년 전의 올드한 연극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웃음 코드에 녹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Q. 배우들이 모여서 고민하는 것들이 어떻게 연극에 적용되나요?

최근 테러방지법이 화제가 됐었잖아요. 이 테러방지법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대중들이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우리의 통장을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고 메일을 들여다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메일로 뭔가 재밌는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했죠. "메일이 뭔지 아냐?" "메일이 뭔데?" "매일 우유" "왜 우리 우유를 열어보는 거지?" "상할까 봐?"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코미디를 만들어요.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대사 속에는 촌철살인의 의미가 있죠. 메일을 열어보는 세상이 될 수도 있으니 우리 한번 고민해보자. 테러는 없어져야 하지만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관심을 가져 보자는 거죠. 이렇게 웃음을 동반하고 비틀어 풍자하는 장치를 만들어 연극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적용을 시키고 있어요.

Q. 15년 동안 출연하고 있는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는 박철민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15년 계속한 건 아니고 2년 하고, 3년 쉬고, 3년 하고, 4년 쉬었어요. 이런 식으로 15년이 넘었어요. 이젠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는 제 아내 같아요. 매일매일 만나니 질려서 '아이고 이놈의 여자 헤어져야지, 이거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일주일 동안 영화나 드라마 촬영하다 보면 '잘 있을까 늘근도둑이야기?', 보고 싶고 궁금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쌓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이미 많은 정이 쌓였더라고요.

Q. 늘근도둑이야기 포스터에 박철민씨 얼굴이 떡하니 박혀있어요. 이런 포스터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세요?

마케팅 차원에서 제가 인지도가 높으니까 제 얼굴이 포스터에 들어가는 거죠. 홍보전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편으로 책임감이 크죠. 후배들 공연들도 체크하고 늘근도둑이야기의 전체 실력을 평준화시키고 싶고, 내가 느꼈던 노하우를 전해주고 싶고, 내가 트레이드마크가 됐으니 내가 안 하는 공연도 퀄러티 있는 풍성한 공연이 됐으면 싶어요.

Q. 앞으로 늘근도둑이야기가 관객들의 기억 속에 어떤 작품으로 남길 바라세요?

보통사람들이 지고 있는, 어깨를 무겁게 하는 그런 스트레스를 덜어 드리고, 한번 신 나게 웃게 만들어 긍정적인 힘이 발휘되는 연극이 되었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신 나게 웃어야 하거든요. 천 번 아니 이천 번 웃겨 드리자. 지금은 수백 번 웃겨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더 웃을 수 있게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늘근도둑이야기가 휘발성의 연극이 되기보다는 울림을 주는 연극으로 거듭났으면 해요. 기본이 코미디기 때문에 그냥 정신없이 웃고 끝나버리지만,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무슨 내용이었지?', '잘 기억 안 나네?' 이러고 말기보다는 소외되거나 약자들에게 같은 편이 되어 주고, 우울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넉넉한 웃음 속에 작은 희망을 주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시원함을 주는 연극이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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