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가던 전통시장에 靑春들 북적… 송정의 기적

"요즘 시장에 젊은 애기들이 많이 와서, 나도 가게도 다 후레시(프레시·fresh)하게 바꿨당께. 전에는 하루에 한 봉다리 팔기도 힘들었는디, 요즘엔 스무 개도 팔고 서른 개도 팔고 항께 가게 문 여는 맛이 나제."

지난 4일 오후 광주송정역 앞 '1913송정역시장'(이하 송정시장)에서 만난 개미방앗간 주인 김인섭(57)씨. 최근 투블럭(옆머리만 짧게 자르는 최신 헤어스타일)으로 머리를 깎았다는 그는 20~30대 상대 호객(呼客)에 정신이 없었다. 김씨 가게 앞 매대에는 미숫가루·고춧가루 등이 250g 단위로 지퍼백에 포장돼 진열돼 있었다. 350㎖ 참기름과 들기름 병은 뚜껑을 종이로 싸서 노끈으로 묶었다. 지퍼백과 기름병에는 '1913송정역시장'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직선거리 150m, 폭 5m에 좌우로 점포 55개가 있는 이 시장은 평일 낮인데도 인파로 북적였다.

10년 전 고향인 광주 송학동으로 귀농하면서, 시장에 방앗간을 차린 김씨는 지난해 초만 해도 가게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단골을 빼면, 손님은 많아야 하루에 서너 명. 한 달에 70만원 벌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 1년여간 현대차그룹이 비용을 지원하고, 현대카드가 '송정시장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면서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지난달 18일 새롭게 바뀐 송정시장이 오픈한 이후, 약 3주간 8만2000여명이 다녀갔다. 하루 평균 4300여명으로 지난해 평균(200명)의 20배를 넘는다.

◇기울어가던 103년 전통시장

작년까지만 해도 송정시장은 희망이 없는 곳이었다. 벽에 금이 가고 빛바랜 2~3층 건물이 줄지어 있는 시장은 점포 3곳 중 1곳이 비어 있었다. 입구부터 악취가 났고, 비가 오면 땅은 질척였다. 지난해 1월, 현대카드 김영관 M-TFT(전통시장 활성화) 팀장이 송정시장을 살리라는 회사의 특명을 받았다. 김 팀장은 "도심 외곽의 송정시장은 KTX 역이 바로 앞에 있지만 주변에 볼거리가 없어 여행객을 끌어들이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고 했다.

현대카드는 2014년 강원도 평창의 봉평장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킨 경험이 있다. 봉평장은 5일장이고 원래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곳이라는 점에서 송정시장과는 다르다. 묘안을 찾기 위해 현대카드 팀은 영국·스페인·포르투갈·일본의 전통시장 30여곳을 3주간 둘러봤다. 이후 수백 번의 회의를 거쳐 변화의 방향을 잡았다. 상점 고유의 스토리를 살리고, 가게를 허물거나 획일화된 건물을 짓지 않으며, 광주송정역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먼저 '매일송정역전시장'이던 이름은 1913년 처음 문을 연 시장의 103년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1913송정역시장'으로 바꿨다. 두 달에 걸쳐 상인 30여명에 대한 심층 인터뷰도 했다. 가게의 역사와 가족 이야기를 듣고 가게 앞에 가족사진과 소개글을 붙였다. 상품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 주인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적었다. 옛 정취를 살리자는 취지로 건물 개·보수와 리모델링은 최소화했다.

◇청년 상인 35명의 위력

상인들 나이가 평균 62세로 고령이다 보니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바꾸고, 상인들을 교육하는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현대카드 팀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20~30대 청년들을 17개 빈 점포에 입점시키는 아이디어를 냈다. 업종은 모객(募客) 효과가 높은 음식점으로 한정했다. 지원자 면접을 거쳐 양갱, 호떡, 크로켓, 수제 맥주 등을 파는 청년 35명이 시장에 들어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30대들 사이에 소문을 타면서 송정시장은 최근 광주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에는 송정시장 식당들에서 찍은 인증샷이 하루에만 수백 개씩 올라온다.

현대카드 팀은 시장의 낡고 거친 느낌은 살리면서, 인테리어와 간판은 모던하게 디자인해 젊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췄다. 시장 위에는 답답한 아케이드 대신, 노란색 망사 차양막을 군데군데 치고 필라멘트 전구를 달아서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송정시장이 새롭게 개장한 이후 약 3주간 청년 상인들은 평일에 하루 평균 55만원, 주말에는 하루 105만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시장에서 3평짜리 가게를 빌려 호떡을 파는 정소피아(31)씨는 "시장에 어떤 위기가 닥쳐도 어르신과 청년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 헤쳐나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