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5.11 10:30

바다물소리와 함께 긴 꿈을 꾸고 맞이하는 아침. 숙소의 5층에서 보이는 바다는 어제와는 다른 회색빛이다. 바다의 해는 바닷가를 찾아가는 낯선 이들에게 꽤 인색한 모습을 한다. 오늘도 일출을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유채꽃 소식이 들리는 산방산으로 향했다. 특이하게 생긴 산방산에 유채꽃이 만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길목마다 노란 봄꽃들이 바람에 향기를 폴폴 날리는 듯 피어있다. 길옆에 피워있는 노란 꽃들만으로도 우리는 매우 즐거운 마음이다.

산방산 기슭에 들어서자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봄꽃의 색만으로도 마음 안에?향기가 가득해진다. 푸른 물빛과 노란 유채꽃밭은 내 안에서 환희의 색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모네의 아름다운 꽃밭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림 속 풍경을 흔들던 바람이 되어 주인공 까미유와 함께 그 꽃밭을 거닐고 있는 듯하였다. 한낮의 햇살을 가리기 위하여 레이스의 양산을 쓰고 걸어가던 까미유의 모습이 불쑥 꽃밭 사이 어디에선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강렬한 인상의 노란 유채꽃밭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길 위에 산방산의 토속적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인 모습의 배 한 척이 바다를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았다.

[시니어 에세이] 용머리 해안과 유채꽃

17세기 아시아의 역사를 바꾸게 하였던 하멜의 배였다. 배의 내부는 하멜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동영상 등 실물 크기의 뱃사람의 모습까지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로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배의 내부를 둘러본 후 우리는 용머리 바닷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길로 운영되는 바닷길이 중간 어느 지점쯤에서 낙석이 발생하면서 사고가 나는 상황이 되자 두 개의 길로 나누어서 중간 부분은 관광객 금지의 지점이 되었다. 하지 마라 하면 더 하고 싶어지고 이별 앞에서 더 안타까워지는 사람의 심리처럼 금지구역 안으로 자꾸만 가고 싶어지는 마음을 돌아보면서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는 6살의 어린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난다. 그 웃음은 조금 전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저장된 노란 유채꽃의 색깔이 되어 가슴 안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5분정도 걸어 들어가자 바다와 화강암의 퇴적층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태고의 신비가 바닷바람의 퇴적작용으로 이루어내는 시간의 흔적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깊은 울림을 지니고 마음 안에서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남겨진다. 굴곡을 이룬 돌의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신이 만든 영역을 침범하는 기분이 되어서 순례자의 마음이 되게 하는 신비로운 곳은 눈길을 바위 아래로 떨구면 깊은 물길처럼 커다란 물의 소리를 내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바위의 끝에 또 다른 영역이 있는 것처럼 그곳은 신비로웠다. 어느 여름날 걸어가던 채석강의 느낌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여름의 바다를 생각하였다. 돌이 이루어가는 그 묘한 느낌에 동행하는 친구는 먼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그다지 말이 없는 친구의 시선이 닿아있는 바다의 끝자락에서 그 고요를 깨트리면 바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신비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은 마음이 되어 경건해지고 있었고, 처음 만나는 제주의 낯선 바다 모습이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바닷길에 갑자기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그 길로 밀려오는 활력의 소리로 고요가 깨지면서 길의 모습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깨어진 고요가 오히려 편안함으로 전환이 되어 바다의 끝자락에 마음을 누이고 크게 파여 물이 고인 웅덩이 앞에 다리를 뻗어본다. 돌이 지닌 신비로움 때문인지 큰 웅덩이 속에 바위를 덮은 물은 너무 맑아서 우리들의 옷 색까지도 거울처럼 선연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용머리 해안의 신비를 경험하고 나오자 갑자기 웃음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용머리 해안으로 들어가기 중간지점에 화려한 유채꽃밭이 있었고 그곳은 유료촬영지로 천 원을 받고 있었다. 촬영요금이라는 단어가 자연의 즐거움을 침범하고 있다는 인색함에 그곳을 피하여 더 가보자고 걸어 들어가 만난 곳이 용머리 해안이었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던 용머리 바닷길을 돈 천 원 때문에 만나게 되었다. 가끔 인연은 이렇듯 예기치 않은 시점에서 행운을 지니고 찾아오고 있나 보다.

봄볕을 비단결처럼 가득 내리는 유채꽃밭과 용머리 해안의 바닷길에 매료된 후에서야 우리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인터넷의 정보를 의지하여 한 끼를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간단히 시장기만 해결하고 우리는 제주시 내의 마트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과 먹거리 몇 가지를 사 들고 숙소로 귀가하였다. 유채꽃 향기와 용머리 해안이 와인의 안주가 되는 멋진 일탈의 밤이 되어 친구와 나는 맑은 와인 잔에 ?떨어지는 진하디진한 꽃향기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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