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5.13 10:07

산행을 하기에 햇살이 더없이 따사롭다. 작년 가을에도 벼르기만 하고 바라본 채로 귀경을 하였던 영실산행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영실입구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하늘이 푸르고 높다.

어리목을 들렸다가 차를 돌려 영실로 가는데 1,800원을 절약한 즐거움이 계속 차안에 즐거운 웃음을 날린다. 어리목에서 1,800원에 입장권을 구입하였다. 잠시 들렸다가 나가는데 다시 영실에서 입장권을 구입하여야 하는 것이 애석하여 매표소에 문의를 하였더니 입장권을 한번 구입하면 한라산 어디에서든 하루 동안 사용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1,800원을 절약하게 된 우리에게 영실은 더욱 반짝이는 한라산의 길목이 되어주었다.

영실입구도 한라산의 어느 길목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산죽과 작은 계단들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쯤 올랐을 때 중간전망대 근처에 이르자 먼 곳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먼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가슴을 울리듯이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을 지니게 한다. 웅장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간다.

[시니어 에세이] 영실 산행과 용눈이 오름

먼 곳으로 보이는 병풍바위의 거대한 모습과 그 곁으로 하늘에 점으로 닿아갈 듯한 오백나한의 봉우리들이 한라산의 신령스러운 모습을 품고 있는 듯하였다.계단을 오르는 한 걸음 한걸음이 다 기이하게 여겨지면서 계단 아래로 내리는 3월의 햇살이 빛나기 시작한다.꿈길에서나 만남이 가능할 것 같았던 병풍바위의 우람한 모습이 몇 해 전 올랐던 관음사로 향하는 하산길에서 만난 거대한 바위벽을 연상시킨다.

영실 계단위에는 까마귀들의 천국인 듯 사람을 보고도 주저하지 않는 모습으로 가까이서 움직이려 하지를 않는다. 오백나한의 어느 계곡 아래쪽이 그들의 본격적인 주거지인 듯 머리 위를 빙빙 도는 모습이 오히려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거주민들의 텃세가 새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하게 하는 까마귀 떼들의 유유함이다. 까마귀들의 텃세에도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이 지니고 있는 협곡의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신이 만들어낸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중간쯤에서 다리가 아파 오르기 힘들다며 먼저 하산을 한 친구 때문에 능선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하산을 하면서 더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그 계곡에 남겨두었다. 가을에 꼭 다시 산행을 하겠다는 마음속 약속을 아쉬움으로 남기고 돌아서는 길목에 어동포 해녀마을로 가다가 만난 김영갑사진작가의 용눈이 오름이 영실산행의 아쉬움을 대신 채워주기 시작한다. 길에서도 느껴질 만큼의 특이한 모습은 봄이면서 깊은 가을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의 사진첩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오름의 모습은 설명 없이도 제주오름들이 지닌 특이함의 형태로 용눈이 오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주의 오름 들이 지니고 있는 둥근 선은 햇살을 받아 넓은 둔덕의 구릉 모습을 변화시키면서 눈으로 느끼는 계절이 아닌 온몸으로 느낌의 체험을 하게 한다.필름을 사기위하여 식사비를 아낄 정도의 애착을 지니고 있었던 작가의 사진 속 오름이 깊은 호흡을 지닌 채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 길로 보이는 오름은 생각 외로 거센 바람이 우리의 접근을 막으려는 듯 둔덕위로 길게 뻗어간 길 위에 가을 숲 같은 갈대의 모습을 깊게 흔들고 있었다. 두 여자가 함께 잡은 힘으로도 그 바람을 이기기가 어렵다.오름 정상에 다다르자 히스크리프가 워더링 하우스를 찾아가는 황량한 들판을 연상시키는 바람이 우리의 걸음을 순간순간 멈추게 한다.봄이면서 가을을 동반 하는 가을빛갈의 용눈이 오름은 겨울의 매서운 바람처럼 우리의 걸음을 제지하는 느낌이었다. 

영실에서 바라보던 한라산 능선의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던 용눈이 오름의 기억으로 남겨지는 것은 한 예술가가 지니고 있던 제주 땅에 대한 애착이었다. 지슬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지니게 되면서 가슴속에 깊숙하게 담게 된 제주의 이야기들이 하나씩 숨겨진 속살을 벗겨내듯이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가고 나면 그 땅이 지니고 있는  시간의 흔적들이  삶의 빛깔처럼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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