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출신 '브라질의 대처'… 경제난·부패로 무너지다

20여 년간 군사 정권에 맞선 게릴라로 활동하며 참혹한 전기 고문까지 이겨냈던 '철(鐵)의 여전사'가 의회의 탄핵 공세에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브라질 상원이 12일 탄핵심판 절차 개시를 가결함에 따라 지우마 호세프(68) 대통령은 이날부터 허울만 대통령인 '식물' 상태로 전락했다. 특히 탄핵에 찬성하는 의원이 재적 의원의 3분의 2(54명)가 넘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상원 최종 표결에서는 탄핵안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던 실낱같던 희망도 사실상 사라졌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불명예 퇴진하고, 전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0)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브라질 좌파 정권의 황금기도 13년 만에 막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말 연방 재정 구멍을 덮기 위해 저지른 정부의 회계 부정 사건이 드러났을 때만 해도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룰라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된 국영기업 페트로브라스 부패 스캔들과 최악의 경제난에도 연금·복지 지출을 고수한 좌파 정권의 무능이 탄핵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의 탄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브라질 헤알화 가치와 주가가 오르는 등 시장도 탄핵을 찬성하는 모습이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이념적으로 정반대인데도 호세프가 '브라질의 대처'라는 별명을 갖게 된 건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때문이다. 불가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인 그는 열여섯에 좌파 게릴라 조직에 투신해 20여 년간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다. 2년여 수감 기간엔 전기 고문도 당했다. 룰라 정부의 2인자로 활동하던 2009년엔 암의 일종인 림프종 진단을 받았지만 이 역시 이겨냈다.

그는 출감 후 대학 공부를 시작해 캄피나스대에서 경제통화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 2001년 노동자당(PT)에 입당하면서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룰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2003년 룰라 정부가 출범한 후엔 에너지부 장관, 수석장관(총리 격) 등을 거쳤다. 2011년엔 대통령에 당선됐고 2015년에는 연임에 성공해 브라질의 3번째 연임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탄핵심판 절차가 개시되면서 연임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할 상황이 됐다.

호세프가 페트로브라스 부패 스캔들에 직접 연루된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를 '부패한 정치 시스템의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원에서 자신의 탄핵을 주도한 에두아르두 쿠냐 전 하원의장과 그의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 미셰우 테메르(75) 부통령을 비롯한 상·하원 전체의원 594명 중 약 60%가 부패 등의 혐의로 형사 입건돼 있다는 것이다. 호세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탄핵 시도에 대해 "브라질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호세프의 직무 정지로 권한을 대행하게 된 테메르 부통령은 변호사 출신의 중도 성향 정치인으로 미국 월가(街)가 선호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건 호세프와 마찬가지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브라질 국민 60% 이상이 대통령·부통령의 동반 퇴진과 조기 대선 실시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개월 이내에 치러지는 상원 최종 표결에서 탄핵안이 가결돼 테메르가 호세프의 잔여 임기를 넘겨받게 되면 '핑크 타이드'(온건 좌파 물결)로 불리며 남미를 뒤흔들었던 좌파 정권들의 몰락 도미노가 브라질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선 지난해 11월 중도 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당선돼 12년 좌파 정권을 교체했고, 작년 12월 베네수엘라 총선에서는 중도 보수 성향의 야당이 압승을 거두고 의회를 장악했다. 지난달 10일 페루 대선에서도 중도 우파 성향의 게이코 후지모리 민중권력당 후보가 1위를 했다.

브라질에서는 지금까지 4번 대통령 탄핵 표결이 이뤄졌지만 1992년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만 실제 탄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