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뒤덮은 '추모 포스트잇 5000장'

"내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아서입니다."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폭 10m, 높이 2.5m짜리 유리 외벽에 노랑·분홍·파랑 등 색색 쪽지 5000여장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지난 17일 새벽 이 근처 상가 화장실에서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숨진 피해 여성(23)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유리벽 아래 인도엔 흰 국화꽃과 안개꽃 500여 다발이 놓였다.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를 기리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곳을 거대한 '추모의 벽'으로 만든 것이다.

이 '추모의 벽'은 17일 오후 4시쯤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이 네티즌은 트위터를 통해 "국화꽃 한 송이와 쪽지 한 장으로 희생자를 추모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 트윗은 하루 만에 4900회 이상 리트윗되며 확산됐다. '추모의 벽'이 쪽지로 뒤덮이자 서초구청은 19일 오전 11시쯤 벽 옆에 폭 7m짜리 게시판을 더 설치했다. 이날 오후 7시 30분에는 피해 여성을 애도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피해 여성은 친구들과 함께 강남역 인근 식당을 찾았다가 변을 당했다. 10번 출구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이었다. 남녀 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던 김모(34)씨가 피해 여성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며 "아무 여자나 죽이려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조현병(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2008년 여름부터 올해 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총 19개월간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는 지난 1월 퇴원한 뒤 약물 치료를 받다가 3월 말 가출하면서 복용을 중단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날 추모의 벽을 찾은 홍유리(여·28)씨는 "지난주 강남역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있었다. 범인이 그 시각 거기 있었다면 나한테 닥칠 수도 있었던 일"이라며 몸서리쳤다. 이주미(여·52)씨도 "너무 무섭다. 앞으로 남녀 공용 화장실은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남성 애도객 진호중(25)씨는 "화장실에 가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게 특권이 돼 버렸다"며 "남자로 태어난 게 행운인 사회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추모의 벽'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일부 극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남녀 간에 성별을 비하하는 볼썽사나운 싸움이 벌어졌다. 일부 여성 네티즌은 "이 나라 모든 범죄자는 '한남충(한국 남성 벌레)'" "한국 남자들, 이쯤 되면 단체로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처럼 남성 전체를 비하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일부 남성 네티즌이 "10번 출구로 모인 여성들을 테러해버리겠다" 같은 글을 올려 갈등을 고조시켰다.

범죄 수사 전문가로 경찰대 교수를 지낸 더불어민주당 표창원(50·경기 용인정) 당선자는 트위터에 "낯 모르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인 범행임은 분명하지만, 피의자의 정신 질환 경력 등으로 볼 때 '여성 혐오 범죄'로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김씨는 피해망상 때문에 평소 여성으로부터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최근 정신분열 약을 복용하지 않아 증세가 악화돼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추모의 벽을 찾은 직장인 송모(여·26)씨는 "여성뿐 아니라 노인이나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가 범죄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 문제 아니냐"며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범인의 변명에 현혹되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