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상품 '가습기 살균제'보상액 놓고… 유통업계 전전긍긍

지난 20일 가습기 살균제 최대 가해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는 대전 유성구 아드리아호텔에서 '제1회 옥시레킷벤키저 사과의 장(場)'을 열었다. 옥시 살균제 제품으로 폐 손상 등의 피해를 입은 1, 2등급(가습기 피해 거의 확실·가능성 높음) 피해자 및 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해 옥시의 아타 울라시드 샤프달 대표와 2시간 40분간 만났다.

하지만 이날도 구체적인 보상 계획은 언급되지 않았다. 세 살 아들을 잃은 곽윤희(36)씨는 "지난 2일 옥시의 사과 기자회견과 달라진 게 거의 없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등 잔뜩 움츠린 유통업계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한도와 범위를 명확히 정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현재 이 사건과 관련,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업체는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또는 '염화 에톡시에틸 구아니딘(PGH)'을 사용한 옥시, 홈플러스, 롯데마트, 버터플라이이펙트(세퓨 제조) 등 4곳. 이 중 버터플라이이펙트를 제외한 3사는 모두 피해자 보상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피해보상 기준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을 밝힌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보상 기준을 마련한 곳은 없다.

◇업체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연관성 분석 몰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2차 정부 판정 결과 146명에 달한다. 여기에 올 4월 25일까지 민간 신고센터에 추가로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수는 120명에 달해 가습기 살균제 사망 추정 인원은 현재 총 266명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관련, 각 업체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옥시와 세퓨는 자체 상품을 만들어 판매했고,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는 PB(자체 브랜드) 상품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다. 업계에서는 PB상품의 특성상 제품 제조와 상품 기획 과정에 대형마트도 참여했기 때문에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도 이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여기에 환경부가 최근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를 함유한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역학조사에 나서면서, 이 물질을 사용한 제품을 판매한 이마트와 애경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올 한 해는 가습기로 시작해 가습기로 끝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업체들이 가습기 살균제와 자신들의 연관성과 책임 등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상 기준 아직 못 세워, "검찰 조사 끝나야 알 듯"

 

해당 유통업체들은 정확한 보상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전례도 없고, 섣불리 보상 기준을 세웠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피해보상에 사용하겠다는 100억원도 1차적으로 그 규모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지, 이 돈으로 모든 피해보상을 마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며 "검찰 수사 결과를 보고 피해보상 규모를 확정할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지난 17일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피해자와 가족 436명이 옥시, 롯데마트, 홈플러스, 애경산업 등 20여곳과 국가를 상대로 112억여원을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 주목하고 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제시한 배상액은 일률적으로 사망 피해자는 5000만원, 폐 손상 등 질병 피해자들은 3000만원, 피해자 가족은 정신적 위자료 1000만원이다. 피해자 가족 소송대리인은 "서둘러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일률적으로 손해배상액을 정한 것이며, 앞으로 소송이 진행되면서 피해규모가 확정되면 청구 금액이 5~10배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가족 측인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기업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이번에 제기한 손해배상과는 별도로 진행될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건의 파장과 피해 규모 등을 고려하면 기업들의 피해보상 규모는 그동안 피해자들이 개별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기업에 요구한 금액 중 최고 수준인 7억~8억원은 돼야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유통업계에선 정부가 나서서 명확한 보상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옥시 사태와 관련된 한 업체의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워낙 피해 규모가 방대해 기업이 자체 분석과 기준으로 보상금 액수를 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며 "정부가 검찰 조사를 바탕으로 정확한 피해 규모와 업체별 책임을 명확히 해 보상 수준을 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추진 움직임도

앞으로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는 실제 발생한 손해보다 수십 배에 달하는 보상금을 징벌적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지난 3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존슨앤드존슨 제품을 40년간 사용하다가 난소암에 걸린 한 여성이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5500만달러(627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피해보상 배상금은 500만달러지만, 그 10배인 5000만달러가 징벌적 손해배상액으로 매겨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해당 법안이 2년간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아 이 제도가 단시일 내에 마련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 많다. 노영희 법무법인 천일 변호사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감을 갖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현재 법체계에서는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며 "외국처럼 천문학적인 액수를 징벌적으로 때리면 망하는 기업이 많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