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 속 영웅을 위로하는 선율 '46, 47'

지난 3일 오후 7시 50분 경기 구리시 수택3동 주민센터 공연장. 무대에 오른 정비담(26)씨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클라리넷을 들었다. 그가 선 채로 연주한 곡은 '더 라스트 왈츠'였다. 객석에 앉은 구리소방서 소방관들과 가족 100여 명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2분 50초 동안의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환호는 없었다.

이날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인 정씨가 직접 기획했다. 그는 대학 후배 이호원(20)씨와 함께 '음악으로 소방관의 마음에 휴식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1년여를 준비해 다른 연주자 두 명과 이날 공연을 가졌다.

정씨는 순직한 소방관의 아들이다. 2014년 7월 17일 전남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수색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다 헬기 사고로 추락해 숨진 강원도 소방본부 소속 고(故) 정성철 소방령(당시 52세)이 그의 아버지다.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정씨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씨는 원래 전공이던 클라리넷을 그만두고 예술경영으로 전과(轉科) 신청서를 제출한 날, 아버지의 비보(悲報)를 접했다. "안 그래도 왠지 음악이 싫어지고,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느끼던 때에 아버지 소식을 듣고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불면증에 걸려 몸무게가 10㎏ 이상 빠졌다가, 폭식(暴食)으로 다시 30㎏ 이상 찌는 등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죠."

학교를 자퇴할 생각까지 했던 정씨는 아버지가 천직(天職)으로 여겼던 소방관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근무했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컨테이너 가건물에 수면실은 2평도 안 돼 보였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게 근무하셨구나'란 생각에 함께 갔던 어머니를 붙잡고 한참 울었죠."

정씨는 소방관들을 위로·격려하는 공연을 갖기로 하고 후배 호원씨와 팀을 만들었다. 팀 이름은 FILO, '먼저 현장에 들어가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First In Last Out)'는 뜻으로, 구조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관을 의미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큰 사고가 터질 때만 일시적으로 소방관에게 눈길을 줄 뿐 실제 처우엔 전혀 관심이 없다"며 "정부나 남을 욕할 게 아니라 내 작은 힘으로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날 공연의 제목은 '46, 47'이었다. 46은 '괜찮으냐, 알겠느냐(Are you OK?)', 47은 '그렇다(I'm OK)'는 뜻으로 소방관들이 각종 재난 현장에서 주고받는 무전 신호다. 정씨는 소방관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로 객석에 있는 소방관과 가족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 소방관은 공연 중간에 무대에 올라와 "딸에게 불쌍하게 보이는 소방관이 아니라 당당하고 영웅 같은 소방관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신혼 2개월 차 소방관 부부는 정씨 팀으로부터 청혼곡을 선물받고,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시간 3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 김양수 소방교는 "특수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동적으로 해소할 수 있어 신선했다"고 말했다. 정현모 구리소방서장은 "공감도 되고 의미도 깊어 정씨 등에게 고맙다"고 했다. 정씨의 어머니 방은영씨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자기 방식으로 채워가는 비담이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했다.

정씨는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소방관을 둘러싼 현실이 개선될 수 있도록 비영리로 이 프로젝트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현충일을 앞두고 며칠 전 아버지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49재 날 편지에 썼던 '최고의 아버지처럼 최고의 아들이 되겠다'는 다짐을 평생 지키며 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