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 도졌다. 낯선 것들이 그리웠다.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 낯선 냄새 등이 끊임없이 손짓했다. 유년 시절의 우리 집은 산비탈 축대 위에 지어진 집이었다. 축대가 있는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고 담장 밖을 내다보는 것을 즐겼다. 담장 밖은 넓은 세상이었다. 널따란 논밭이 보였고 눈길 닿는 곳에 남자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밑으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궁금했다. 보이는 그 집들에는 누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유년 시절부터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사는 것들이 늘 궁금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어른이 되고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았으니 아마도 몸 깊숙이 유랑(流浪)의 기질이 숨어 사는 모양이었다. 그랬던 내 가슴이 태평양을 건너도 대서양을 건너도 이제는 무덤덤에 가깝다. 점점 더 낯선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설렘이 줄었다는 증거다. 늘 새로운 것을 찾고, 그 새로움에 희열을 느끼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다시 내 삶이 이전보다 활기차게 돌아가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그런 일이 줄고 있다.
어디로 갈까 생각했다. 중국엔 이제 더는 안 가겠다고 했었다. 그 생각을 바꾼 것은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태항산맥이었다. 텔레비전이나 사진에서 만난 태항산맥의 모습은 마치 다른 행성처럼 낯설었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깎아내어 위태위태하게 만들어 논과 밭, 천 길 낭떠러지에 만들어 놓은 구불구불한 길.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 웅장한 산허리를 휘감고 흐르는 운무(雲霧)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곳이라면 익숙함에 잠시 잊고 있던 낯선 것들을 만나기엔 충분할 것만 같다.
태항산맥의 여정은 중국 청도(칭다오, Qingdao)에서 시작된다. 중국 산동성 동부에 있는 도시로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다. 산동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도시 인구는 930만 명 정도로 중국 내에서는 중소도시에 속하는 곳이라는 데도 우리나라 서울특별시 인구보다 조금 적을 뿐이다. 청도에는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설된 길이 440m의 다리인 잔교가 있으며 세계 각국의 건축물이 모여 있어 '만국건축박람회'라 불리고 있는 유명한 별장 구역인 팔대관이 있고 천장이 아름다운 시장으로 유명한 스카이스크린시티가 있다. 2008년 당시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해상경기가 열렸던 청도 올림픽 요트경기장이 있으며 야경이 매우 아름다운 유럽풍의 휴양 도시다. 그러나 사실 청도는 다른 여행 때도 몇 번 들렀던 도시라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아담한 청도공항에서 내린 일행들은 마중 나온 연변출신 가이드와 작은 29인승 관광버스로 갈아탔다. 일행이라 봐야 9명. 단출하기 짝이 없었지만, 시끌벅적했다. 내가 태항산맥의 산을 몇 개 보겠다고 그곳에 간다고 동창 모임에서 한 말이 화근(?)이었다. 그리하여 단출하게 떠나려던 계획은 시끌벅적한 여고 동창들과의 수학여행이 되었다. 서로 지나온 길은 달라도 오늘 여기에 모여, 어깨에 짊어진 삶을 잠시 내려놓고 여고 시절로 돌아가 눈물이 날 만큼 깔깔대고 있었다.
그 마음 만큼이나 청도 하늘은 맑았다. 청도는 몇 번을 와 봐도 그동안 익숙했던 도시와는 달랐다. 조금은 한가한 길임에도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는 누가 소리가 더 큰지 내기라도 벌린 것 같았고, 사람들은 바쁜 게 없다는 듯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신호등이야 있건 말건, 중앙선이야 있건 말건, 자동차나 사람들이나 그건 개의치 않고 길을 건넜고 미루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서서 삶의 무게에 지쳐있던 우리까지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