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으로 말하는 세상

지난 1일 오후 4시 경기 안양시의 한 마트에서 일하는 전모(여·43)씨는 느닷없이 직장 동료인 조모(37)씨에게 폭행을 당했다. 전씨가 반말을 하는 등 무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씨는 계산대에 있던 전씨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위협했다. 전씨 주위를 돌며 물건을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고 급기야 전씨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조씨는 직원 휴게실로 대피한 전씨를 따라가 계속 위협했다. 경기 안양동안경찰서는 조씨를 단순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전씨의 딸이 8일 SNS에 올린 마트 내부 CCTV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반나절 만에 '이 정도로 폭행이 벌어질 정도면 나도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때리고 맞는 일이 일상화됐다'는 댓글 6000여개가 달렸다.

전씨의 딸은 "(조씨가) 어머니 몸을 만지려고 했다"며 성추행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경찰은 "성추행 혐의는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했다. 조씨는 뇌병변장애 5급 판정을 받은 지적장애인으로, 경찰에 "평소에 (전씨에게) 무시를 당해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한국 사회가 '욱'하는 화를 참지 못한 범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몸이 부딪혔다는 이유로,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주먹다짐을 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2004년 1만810건이었던 우발적 폭행 건수는 10년 뒤인 2014년 7만1036건으로 5배 넘게 증가했다. 욱해서 일어난 살인 사건도 2014년 한 해 동안 347건에 달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교수는 "사소한 갈등이 분노의 '불쏘시개'가 돼 폭행이나 심지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4일에는 식품회사인 풀무원건강생활의 지점관리팀장 변모(44)씨와 영업사원 김모(29)씨가 노래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직장 동료 한모(29)씨를 때려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회사 역삼동 직영점장을 맡고 있는 한씨가 변씨에게 "우리 직영점을 홀대하지 말고 잘 챙겨달라"고 하자, 한씨와 입사 동기인 김씨가 "상사에게 말버릇이 뭐냐"며 소리쳤다. 둘의 말다툼은 곧 주먹질로 번졌고 변씨도 폭행에 가담했다. 변씨와 김씨에게 얼굴 등을 폭행당한 한씨는 뇌출혈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지만 뇌사 상태에 빠졌고 나흘 만인 8일 오후 2시 숨졌다. 경찰은 변씨와 김씨를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욱하는 범죄의 피해자는 주로 여성이나 아동, 노인 등 가해자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이다. 지난 3일 경기 수원 권선구의 한 편의점 앞에서 행인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김모(여·30)씨에게 피해를 당한 것은 70세 노인이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기분 나쁘게 쳐다봐서"라고 범행 이유를 밝혔다. 그는 "옷가게를 열었다가 사업이 잘 안 돼 화가 쌓였다. 세상 사는 게 참 짜증 났다"고 했다. 오윤성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우발적 폭행은 힘없는 약자(弱者)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죄질(罪質)이 나쁘지만, 대부분 단순 폭행 혐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처벌이 약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욱하는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사회적으로 경쟁과 갈등이 심해진 상황에서 짜증과 분노를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가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우리 사회는 '화병'이 날 정도로 구성원들이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면서 "감정이나 충동 조절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가 욱하는 범죄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다른 사람을 눌러야 내가 산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사소한 불만까지 약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으로 해소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