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에도 있는 '자살보험금' 안주겠다는 생보사

'자살보험금'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금융 당국과 보험사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3일 "소멸시효 완성 여부와 상관없이 생명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발표하면서 14개 생보사들에게 5월 31일까지 지급 계획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신한·메트라이프·하나·DGB생명을 제외한 10개사가 '지급 유보' 방침을 정하며, 금융 당국의 요구를 외면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미지급 자살보험금 2465억원을 둘러싼 충돌

생보사들은 2000년대 초 사망보험을 판매하면서 재해사망특별약관을 만들었다. 특약에 따르면,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난 뒤 자살할 경우에 일반사망보험금과 별도로 재해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부터 생겼다. 생보사들은 "일본의 보험 약관을 들여오면서 실수로 약관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면서 "자살은 재해가 아니기 때문에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보험금 지급 거절의 이유를 댔다. 미지급 보험금은 2465억원(총 2980건)에 달했다. 자살보험금 지급 논쟁은 지난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약관을 잘못 만든 것은 보험사들의 귀책 사유"라면서 "보험사들은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해 논쟁이 일단락 되는 듯했다.

그런데 생보사들은 이번엔 시효 문제를 들고 나왔다. 소멸시효가 2년인데 시효가 지난 뒤 지급 신청을 했다면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전체 미지급 보험금 중 소멸시효 기간이 경과된 건은 2314건(2003억원)이다. 생보사들은 법원에서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하급심에서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의 확정 판결이 나면 그때 주겠다는 것이다. 한 대형 생보사 관계자는 "근거도 없이 보험금을 지급했다가 나중에 배임 문제에 휘말리면 누가 책임을 지겠느냐"고 말했다.

금감원은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주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시효가 지나간 이상, 보험금 지급 책임은 생보사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특약 가입자 A씨가 보험 가입 2년이 지난 뒤 자살을 했다고 치자. 가족들은 A씨가 자살을 한 지 6개월 만에 보험금 청구를 했지만, 생보사들은 자살보험금을 줄 수 없다며 일반 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이렇게 자살보험금 지급에 대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시효(2년)가 지나자, 이제는 생보사들이 시효가 지나서 못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부분의 보험금 미지급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시효가 지난 것"이라면서 "생보사들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러설 수 없는 금감원, 뭉치는 '빅 3'

금감원은 생보사들이 금감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소멸시효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자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이다. 특히 금감원은 생보사들에 대한 현장 점검에 돌입해 직접적인 압박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금감원이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는 생보사들이 정당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 외에도, '더 이상 보험사들에게 밀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보험사들은 보험 상품 가격 자율화 등을 거치면서 금감원의 영향력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금감원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했음에도 대부분의 생보사들이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것도 결국 이런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생보사들은 삼성·교보·한화생명 등 업계 빅 3를 중심으로 버티기에 나섰다. 한 생보사 임원은 "대법원이 명확한 판단을 내리면 그에 따라 하겠다는 것인데 금감원이 너무 무리하게 보험사들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