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6.21 10:03

“통 토통 토토통 통통”

드디어 시작됐다. 매년 이맘때, 6월 중순께로 접어들라치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북소리’다. 바로 창문 앞 살구나무가 내는 작은 북소리다. 살구꽃이 핀 거야 단박에 알았다.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에 닥지닥지 연분홍이 솟아나니 눈부터가 호사를 누렸다. 열매는 언제 들어앉아 여물어갔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꽃 이불이 개켜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 이파리들 속에서 초록은 동색이라 눈에 띄질 않았다. 어느 날 노란색으로 드러나나 했더니 이내 주황색으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저, 다 익었어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아무 살구나 다 소리를 내는 건 아니다. 보도 옆에 일렬로 주차된 차들의 지붕에 떨어질 때 소북이 울린다. 한밤중이나 새벽이면 소리는 더욱 명징해진다. 영화 ‘위플래쉬’에서처럼 천둥 번개가 치는 드럼 소리는 아니다.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같다고 할까. 가슴에 서서히 동그라미 파문을 그리며 나로 하여금 한 해의 딱 중간에서 지나온, 지나갈 삶을 헤아리게 한다. 낮에는 소음에, 곧 장마가 시작되면 빗소리에 묻혀 올해의 살구 소리는 더는 듣기 어려워진다. 아파트 2층에 사는 큰 즐거움이 끝나는 셈이다.

창문을 열면 손에 닿는 살구나무. 이미 살구가 많이 떨어지고 조금 남았다.

창 하나를 두고 집 안과 밖에서 나와는 30년을 넘게 마주 보고 살아온 살구나무다. 이제는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만질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수년 전 가을, 태풍 곤파스가 몰아쳤을 때는 미친 듯이 휘둘려대는 모습이 부러져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가슴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뿌리째 뽑힌 나무며 꺾인 나뭇가지들이 사방에 널브러졌어도 살구나무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렇다. 북소리는 그 이후 내게 들려왔다. 열매가 맺히면서부터 매년 울렸을 소리였다. 볼 때마다 기특하구나 싶더니 그제야 들을 준비가 됐던 것일까.


지렁이 울음소리

곤파스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던 살구나무는 직장과 가정으로 정신없이 살던 내 모습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지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듣기 어려운 때였다. 내 안의 소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족들의 소리도 좀체 들리지 않았다. 당시 남성 주도적인 직업에 힘겨워하는 엄마를 둔 죄밖엔 없는 아이들을 “빨리빨리”로 다그쳐 어린 마음에 상처를 남기진 않았는지…. 그때 살구의 북소리를 들을 귀가 있었다면, 내게 가장 귀한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만의 법고(法鼓) 소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침저녁 예불을 올릴 때, 스님은 양손에 든 북채로 심(心)자를 크게 그리며 법고를 두드린다. 불교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에 비유되고 있듯이 법고 소리는 마음을 깨우고 번뇌를 잠재운다. 법고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는 귀 보다 심장에 먼저 박자를 감는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만의 북소리가 있다고 하는가 보다.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이 기억에 쨍하다. ‘아, 저 북소리의 유혹. 가족이 말리는데도 나는 그 북소리를 따르고 말았다.’ 병사로서 진군하지 않는 바에야 하나의 북소리가 아닌, 나만의 북소리를 알아채야 할 터다.

문제는 소리는 나오고 있는데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청력이 약해지기도 하지만,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탓이다. 살구의 북소리를 오랫동안 듣지 못했듯이 말이다. 바쁜 마음과 곤한 몸으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는 얘기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런 소리가 다 있나? 아나운서는 ‘밟아야만 꿈틀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렁이 울음소리 들을 수 있는 세상 되어야 한다’는 어느 시구를 읊어줬다.

딴에는 나만 들어봤을 것 같은 소리가 하나 있긴 하다. 다름 아닌 쌀이 불는 소리다. 저녁을 위해 쌀을 씻어 담가놓고 잠시 책을 펼쳐 든 어느 날, 조용한 집안에서 어떤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넓지도 않은 집 안 구석구석에 귀를 쫑긋거리며 서성이다가 부엌에서 아, 그 소리를 만났다. 물로 몸집이 불어나면서 쌀알끼리 서로 밀치는 소리였다. 마치 쌀이 살아있는 듯 여겨져 한 톨도 허투루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 지렁이 울음소리란 과연 어떤 소리일까? 내게 들을 귀부터 생겨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그 북소리를 따르고 말았다’

살구나무는 올해 유독 열매를 많이 달았다. 지난해의 해거리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무는 이번이 북소리를 내는 마지막 해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늦어도 내년 초쯤이면 모두가 떠나고, 모든 게 허물어짐을 모를 리 없다. 나무고아원도 있다는데, 5층 아파트의 두 배가 넘는 키로 위풍당당한 메타세쿼이아들의 차지나 되진 않을까. 기껏해야 우리 집 높이로 아담한 살구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나는 새로 지은 집에 돌아와 살 것이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 정겨운 북소리를 나누기란 불가능할 성 싶다.

손 내밀어 주황색이 짙은 살구 몇 알을 딴다. 호두알만 하다. 깨끗이 씻어 깨물려니 양쪽으로 쫙 갈라진다. 갈색의 단단한 씨가 톡 튀어나오면서 북소리 없이도 일러준다. “잘 익었어요.” 한입에 달콤새콤함이 가득해진다. 고맙다, 살구야. 이렇게 글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너와의 영이별이 아주 허전할 게 틀림없다. 이사 간 낯선 곳에서 내년 이맘때쯤, 네 소리는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때는 내 안의 북소리를 들으마. 그리고 ‘그 북소리를 따르고 말았다’고, 나도 자식과 손주들에게 얘기할 수 있게 되면 좋으련만. 창밖에선 북소리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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