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보려 수그린 남자, 필명은 '屈己'

어느 늦가을 해질 무렵 설악산에서였다. 금강초롱 꽃송이 여럿이 나무에 매달렸는데, 어스름 햇빛이 비치자 유독 한 송이가 환히 빛났다. 말 그대로 초롱 같았다. '내게 꼭 맞는 꽃'(궁리)을 쓴 이굴기(57·본명 이갑수)는 "땅과 하늘이 연결되며 세상 만물이 소통하는 이 비밀스러운 순간"을 잊을 수 없는 경험 중 하나로 꼽았다.

시인이자 출판사 사장인 그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고 꽃을 보러 다닌다. 이유를 묻자 "저 꽃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는 얼마나 휑했을까, 모든 꽃은 홀로 고요하게 저마다 존재한다는 느낌 때문"이라며 "꽃은 이 세상을 마무리해주는 보석 같다"고 했다. 인생의 빈 곳이 채워지는 듯한 남모를 경험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소 먹이러 다닐 때 봤던 고마리, 뚝새풀, 며느리밑씻개 같은 무수한 풀과 꽃 이름을 알게 되면서, 내 인생의 풍경이 완성되더라"는 것이다.

그는 꽤나 먼 길을 돌아 꽃에 입문했다. 서울대 식물학과를 나와 민음사와 사이언스북스에서 일했고,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해 제15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1999년 궁리 출판사를 세워 독립했고, 본격적으로 꽃을 보러 다닌 지는 겨우 5년째. 인생 내내 대학 전공과 불화(不和)하다 뒤늦은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스스로 "늙은 복학생 같다"고도 했다. 호는 꽃을 보기 위해 몸을 숙인다는 뜻의 '굴기(屈己)'.

책은 산과 들에 피는 꽃 84종을 보고 엎드려 절하고 냄새 맡고 입에 넣어보고 쓴 매우 '개인적인' 현장 기록이다. 식물의 생식기관인 꽃의 생태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는 "세상엔 고수(高手)가 많기에 꽃 이름 몇 개 외우는 정도론 아는 축에 못 낀다"고 했다. 꽃은 워낙 변이가 많아 꽃 이름을 알려주는 앱(응용 프로그램)도 만들어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재미는 다른 곳에 있다. 가장 좋아한다는 '개별꽃'에 대해 그는 "있으나 마나 한 꽃, 너무 흔한 꽃인데 정이 가고 보면 눈이 간질간질해지고 종내에는 그 간지러움이 손으로 전염되는 꽃"이라고 썼다. "솜털을 뽀송뽀송하게 달고 팽그르르 돋아나는 잎.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나무에게도 꽃만이 전부가 아니다"(때죽나무) "가을이 오도록 가지의 포로가 된 별들이 마침내 벌컥 화를 냈다"(당단풍나무) 같은 표현이 곳곳에서 눈을 멈추게 한다.

직접 꽃에 대해 쓴 시 한 편 없을까.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작파한 지 오래"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말의 꽃이 시(詩)라면, 자연의 시는 꽃"이기에 시 쓸 이유가 없는 걸까. 한편으론 책에 실린 '꽃 글' 한 편 한 편이 시가 아니면 또 무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 식물 4200종, 나무 900종, 풀 3300종을 볼 수 있는 한 다 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라고 한 고은의 시 '그 꽃'처럼 발견의 기쁨을 찾아 산행(山行)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