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署 간부 전원, 웬 '사이버 망명'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경찰서(강남서)의 과장급(경정) 간부 12명 전원이 해외 모바일 메신저인 텔레그램에 단체로 가입했다. 정태진 강남서장이 "앞으로 수사 정보 같은 업무 내용은 카카오톡 대신 텔레그램을 통해 공유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국내 메신저보다 보안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텔레그램을 통해 수사 정보 유출 같은 보안 사고를 막겠다는 뜻이다.

러시아 개발자가 만든 텔레그램은 대화 내용이 서버에 저장되지 않는다. 또 대화 상대방이 화면을 캡처할 경우, 이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기능이 있어 대화 내용이 유출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이런 보안성 때문에 텔레그램은 그동안 국내에서 사생활 정보 유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인기를 끌었다. 지난 2014년 9월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을 상시 단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을 때 카카오톡 등 국내 메신저 이용자들이 대거 텔레그램으로 옮겼다. 이런 현상은 '텔레그램 망명(亡命)'으로 불렸다. 지난 3월 테러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도 국내 텔레그램 이용자 수가 1주일 만에 207만명에서 270만명으로 급증했다.

최근 텔레그램 망명의 특징은 일반 시민 위주였던 과거와 달리, 경찰·검찰 등 사정기관이나 행정기관 공무원들까지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남서에 앞서 서울 서초구청도 지난해 9월부터 조은희 구청장의 지시로 6개 국(局)·10개 과(課) 전용 텔레그램 방을 만들어 정책 등 주요 업무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공무원들의 '망명' 목적은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들은 자신의 개인 정보가 국가기관에 넘어갈까 봐 텔레그램으로 옮긴다. 반면 공무원들은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수사 정보나 민감한 정부 자료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서초구청은 지난 2013년 조이제 전 행정지원국장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婚外子)로 지목된 채모군의 개인 정보를 유출한 혐의가 드러나 홍역을 앓았다.

강남서의 집단 텔레그램 가입도 최근 잇따른 정보 유출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서는 그동안 카카오톡 같은 국내 메신저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를 협의하고 수사 정보를 교환해왔다. 하지만 최근 강남서 소속 경찰관들이 '정운호 로비 사건'으로 구속된 법조 브로커 이동찬(44)씨에게서 금품을 받고 수사 기밀을 알려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강남서가 맡고 있는 배우 겸 가수 박유천(30)씨의 성폭행 고소 사건도 사실과 다른 혐의나 수사 내용이 각종 사설 정보지(찌라시)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강남서 관계자는 "수사 기밀이 자꾸 바깥으로 새는데, 내부 유출자를 색출할 수 없기 때문에 메신저 변경으로 보안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메신저를 바꾼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보안이 강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경찰 관계자는 "통상 기밀 유출은 증거가 남는 메신저를 쓰지 않고 전화나 대면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면서 "누군가 텔레그램에서 본 기밀을 외부에 유출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막을 방법이 딱히 없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는 "강남서의 메신저 변경은 보안 강화 목적이 아니라 나중에 피의 사실 유포 혐의로 재판이나 검찰 수사를 받을 때 불리한 증거로 활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텔레그램은 서버를 외국에 두고 있기 때문에 국내 수사기관이 감청이나 압수 수색을 통해 대화 내용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텔레그램 망명(亡命)

지난 2014년 9월 검찰이 사이버 명예훼손을 차단하기 위해 모바일 메신저 등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사생활 정보 유출을 우려한 카카오톡 메신저 이용자들이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 텔레그램(Telegram)으로 대거 옮긴 현상을 가리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