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들이 글로 되살린 생생한 6·25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지고 폭탄이 떨어졌다. 내 귀에 "탕"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전우들의 비명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같이 뛰어가다가 전우가 한순간에 땅으로 꺼져버려도, 팔다리가 뜯겨 나가도 나는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대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면 다 총으로 쐈다.'(6·25 참전용사 장오봉씨의 자서전 중)

지난 23일 경기도 파주 한민고등학교에서는 6·25 참전용사 4명의 자서전 '나라사랑정신, 잇기 위해 잊지 않겠습니다' 발간회가 열렸다. 발간회에는 자서전 주인공인 참전용사 장오봉(86)·조선영(89)·엄봉용(82)씨와 두 달 전 심장 수술을 받은 김구현(85) 참전용사의 아내 김순옥(84)씨가 참석했다. 또 이들의 자서전을 대필(代筆)한 이 학교 윤채빈(18)양 등 한민고 고3 학생 18명이 자리를 같이했다.

한민고 학생들은 지난해 6월부터 1년간 4명의 참전용사를 인터뷰해 200쪽 분량의 자서전 1권으로 묶어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참전용사들이 창씨 개명을 당한 일부터 6·25전쟁에 휘말려 겪어야 했던 참혹한 실상이 생생히 담겨 있다. 이날 학생들로부터 자서전을 건네받은 참전용사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엄봉용씨는 "학생들이 보잘것없는 얘기를 재밌고 생생하게 잘 써줬다. 이 책은 대대손손 물려줄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자서전 대필은 작년 6월 한민고 국어 교사가 던진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수업 시간에 김형중 교사가 "해마다 생존자가 줄어드는 6·25 참전 용사분들의 희생 정신과 애국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자, 학생들이 "그럼 우리가 할아버지들의 삶을 기록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곧 교내에 '자서전 대필 프로젝트'가 공고됐고 학생 60명이 지원해 18명의 '대필자'가 선정됐다.

자서전 지도 교사를 맡은 김 교사는 이후 인근 파주에 사는 참전 용사들을 섭외했다. 김 교사는 "할아버지들은 내색은 안 하셨지만 다들 고령(高齡)인 데다 아픈 기억을 꺼내어 인터뷰하느라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학생들의 질문에 다들 열심히 응해주셨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6·25전쟁에 대한 배경 지식을 공부한 뒤 지난해 8~9월 두 달간 주말마다 참전 용사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원고를 쓰기 시작해 해를 넘겨서까지 퇴고를 거듭했다.

김구현씨의 자서전 대필을 맡았던 이승희(18)양은 "인터뷰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잊혀질 뻔했던 참전용사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한민고는 전근이 잦은 군인들을 위해 정부가 예산을 부담해 2014년 문을 연 자율형사립고로 재학생의 70%가 군인 자녀로 구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