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하고 부르면 뒤돌아보는 눈매가 서글서글하니 예쁘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지나치기만 할 것 같던 귀농의 삶이 단단한 믿음으로 굳힌 것은 ,너른 들판을 향해 힘껏 뻗은 손은 어느새 짝꿍의 손을 맞잡고 있는 것은, 그렇게 새댁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봄처럼 갑자기 오게 되었다.
도시아가씨, 농촌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회계사로 잘 나가던 도시 아가씨 이정현씨는 남부러울 게 없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 해부터 IMF로 회계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바빠진 일상. 막연히 바쁘게 사는 것은 나쁘진 않았다. 원하던 일이었으니 열심히 했고, 남들 부럽지 않을 만큼의 급여가 다달이 들어왔으며 신체는 건강했다. 하지만 새벽에 출근해 다시 새벽에 퇴근하는 날들의 반복은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이 바쁜 만큼 결혼생각은 저절로 떠밀려 갔다. 그러면서 가끔 밀려오는 숱한 회의감은 그녀에게 자꾸 삶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이 순간이 행복한 것인지, 지금 잘 살고 있는 건지. 그리고 계속 이대로 살면서 후회하지 않겠냐는 것인지를…. 7년 전의 일이었다.
돌아갈 곳은 언제나 너른 들판이 있는 한적한 시골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욕구가 생겼다. 예쁜 집과 텃밭을 가꾸며 살 거라는 마음은 한 해, 두 해가 갈수록 확신이 생겼다.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지금까지의 밥벌이 지식을 살리면 돈벌이도 가능하다 싶었다.
욕구를 실천에 옮겨야 할 때라 생각하며 자연스레 주변에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단어씩 흘려보냈다. 처음엔 제주도와 강원도 춘천을 알아보았으나 아무런 연고가 없어 외로울 것 같았다. 그때 고향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의 고향은 전북 전주. 초등학교 5학년 말에 서울로 이사하면서 고향과 멀어졌던 그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고향 근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귀농귀촌? 전북에서 답을 얻다
여자 혼자서 농촌으로 가려니, 사전 공부가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귀농귀촌 네 글자를 치니 ‘전라북도귀농귀촌지원센터’라는 사이트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전라북도라니 이토록 반가울 수가!!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니, 월별 교육일정부터 귀농귀촌에 관한 정보가 무수히 쌓여 있었다. 2~3일에 한 번씩은 지원센터 홈페이지를 찾아 귀농귀촌에 관한 정보를 메모하고 외워보곤 했다.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한 전라북도귀농귀촌지원센터의 서울사무소에도 직접 방문해 전북의 지원정책 안내책자인 가이드북도 받아 정보를 익혀나갔다.
지원센터와의 꾸준한 상담과 정보제공을 받으면서 귀농귀촌박람회 소식이 있으면 시간이 될 때마다 참여해 관련 정보를 습득했다. 각 박람회마다 타 도의 부스에서 관련 상담을 받아봤지만 그녀를 강렬하게 이끄는 곳은 여전히 전라북도. 더 이상 미루기만 할 수가 없었다. 앉아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을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정현씨는 2015년 4월, 「김제시수도권귀농학교」의 교육을 신청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은 자꾸 그녀의 발걸음을 끌어 들였고, 교육을 받는 내내 느낌이 좋았다.
김제에 대한 첫 인상은 따뜻해서 좋았단다. 유난히 추위에 약했던 그녀에게 김제의 너른 들판과 그 품이 주는 위안은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2박 3일동안 함께한 34명의 교육생 중에서도 한 목사부부와 유독 마음이 잘 맞았다.
이미 김제로 귀촌해 실제 농촌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던 목사부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슬기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함께 나눈 이야기들은 그녀가 귀농을 결정적으로 결심하는데 많은 보탬을 주었고, 교육 후에도 자연스레 연락하며 농촌의 삶에 대한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번 와! 좋은 일이 생길거야!
언젠가는 가리라는 꿈이 ‘곧’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을 때 즈음. 7월 어느 날이던가, 부부는 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을 테니 김제에 한 번 다녀가라고 재촉했다. 좋은 일? 그게 뭘까? 내심 궁금하던 차에 속내를 알게 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잘생기고 성실한 농촌총각이 있으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녀 사전에 결혼이란, ‘소통이 잘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이제껏 만나본 사람들은 그 ‘소통’이 안 되었단다. 반신반의 하던 중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만나보라는 부부의 조언과 더불어 결혼보다는 시골의 삶이 더 궁금하던 찰나의 8월 1일, 그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잘생겼다, 성실하다, 착하다. 이 세가지의 장점만 알고 만난 남자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나와서인지 농부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오후 3시의 만남은 한 자리에서만 네 시간이나 이어졌고, 둘은 공통 관심사가 많았으며 딸기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일치했다.
이상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남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 강형진 이야기
남자의 이름은 강형진. 귀농 3년차로 그녀와는 동갑내기였다. 김제가 고향인 그는 서울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수재였고, 요가학원을 10년이나 운영했다. 빡빡한 도시생활은 그에게 건강한 삶의 기준을 다시 떠올리게 했고, 2011년 고향길에 오른 그는 귀농 첫 해, 열무농사를 지었단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의 괴리감은 그에게 농사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었고, 그는 농사의 기본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수확에 실패하고 나니까 옛날 농부가 볍씨를 틔우는 순환농법을 중심으로 분업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작목 선택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시설하우스 작목을 생각했는데 시설비가 비싸서 망설였어요. 하지만 FTA협상 후 경쟁성 확보까지 생각하니 딸기만한 게 없더라고요. 딸기는 이틀만 지나도 못 먹게 되는데, 저는 그 단점을 장점으로 본거죠. 하지만 딸기농사 첫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어요. 농사라는 게 쉬운 게 없더라고요. 하지만 마음을 편히 가지니 걱정보다는 즐거움이 앞서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농사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은 연애에도 마찬가지였다. 1주일에 한번 씩 서울로 와서 얼굴만 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녀의 취향과 관심사를 존중해주었고 주저하는 그녀를 꿋꿋이 기다려주었다. 큰 싸움 한 번 없이 결혼까지 온 걸 보면 무던한 그녀의 성격만큼 그의 성향도 비슷했음이 틀림없다.
세 번째 만남부터 자연스레 결혼얘기가 오갔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결혼은 그를 만난 지 7개월만에 성사되었다.
벽골제의 전통혼례로 농촌의 삶을 시작하다
2016년 2월 20일. 우리나라 농업의 발상지인 벽골제(사적 제111호) 명인학당에서는 시끌벅적한 잔치가 벌어졌다. 명인학당 훈장의 집례로 치러진 혼례예식에는 양가 친지와 지인들의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가득찼고, 그와 그녀는 부부가 되었다.
결혼 이후 많은 것이 변한 그녀의 삶. 삶의 터전부터 바뀌었으니 본인에게는 엄청난 변화일 것이다. 아직은 낯선 환경에 마을주민들의 관심도 익숙하진 않다. 새댁이란 딜레마와 농부의 아내라는 자리도 어색한 건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사는 게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복잡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불안정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완전한 제 삶이 아니에요. 현재는 완전히 내 편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좋습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조차 행복이지요.”
신혼여행은 딸기 수확이 마무리 되는 6월에 갈 예정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대로 따르리라 마음먹은 부부. 앞으로는 ‘미스터 딸기팜’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딸기 농장에 더 큰 재미를 붙여볼 계획이다. 부부는 양액을 이용한 고설재배를 시도하며 품질 좋은 딸기를 생산하는 데는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강형진, 이정현 부부가 전하는 귀농의 삶
풍족하진 않지만 그 안에 답이 있을 겁니다!
"작물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배신하지도 않지요. 사람과의 관계보다 진실합니다. 공을 들인 것만큼 결과가 나오니 마음도 그에 따라 선해지지요. 거짓말하지 않는 환경이 저절로 되니까 완전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성실하게만 하면 삶은 윤택하고 행복해져요. 우리 부부가 생각하는 편안한 삶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행복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돌아온 저녁이면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것. 무엇보다 마음이 건강하면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농사도 마찬가지죠. 삶의 충만함을 위한 농사라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