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날 꾸짖는 이 공책… 이상하게 힘이 되네

"100일이면 곰도 사람이 되는데 넌 포샵(사진 보정 작업)으로도 안 되겠다. 사람은 언제 될 수 있을까?" 직장인 이모(28)씨가 최근 구입한 다이어트 수첩 표지엔 곰 탈을 쓴 소녀가 빈정대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그림과 함께 윗글이 적혀 있다.

쓰는 사람이 기분 나쁠 법한데도, 이씨는 "이걸 쓰면 꼭 다이어트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00일 다이어트를 목표로 한 이 수첩의 속지는 '살쪘다고 징징대지를 말든가 먹지를 말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해!' '아이스크림이 생각나? 전신 거울이나 봐' 등 사용자의 '염장을 지르는' 글귀로 가득하다.

◇공책 표지에 '넌 뭘 믿고 공부 안 하니?'

10일 서울 광화문 핫트랙스 문구점 매장에선 이 같은 자학성(自虐性) 문장이 적힌 문구(文具)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원시인도 동굴에 메모하던데, 넌 뭐… 진화가 덜 됐니?'(수첩) '넌 뭘 믿구 공부를 안 하니? 어디 숨겨 논 빌딩이라도 있어?'(미니 노트) '까먹을 게 따로 있지, 그렇게 까먹다 돼지 된다, 돼지야."(단어장) '어떻게 하면 한 개를 못 맞추냐?'(수학 연습장) '지금 놀면 평생 논다, 놀아보니 별거 없네.'(공책) '오빠들 스케줄은 스쳐만 봐도 다 외우더니 수업내용은 뇌를 스쳐 지나가지?'(메모 카드) '교통비는 오르는데 네 성적은 안 오르네.'(스티커 카드)

빈정거림을 넘어서서 좀 더 강한 질책이 표현되기도 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케 하는 판화체 그림 속 유격장 조교가 무서운 표정으로 등장해 '공부할 땐 연애하지 않습니다'고 손가락질을 하거나, 성적표를 든 손이 부르르 떨리는 그림 위에 '공부 안 한 내 성적표 대재앙을 일으킨다'는 표어를 쓴 공책도 있다. 다른 문구점에서도 이 같은 글귀가 적힌 제품을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소비자 약점 끄집어내 강한 자극으로

경영학 측면에서 이런 문구류의 유행은 '결함(inadequacy)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나 삭스의 책 '스토리 전쟁'에 따르면, 결함 마케팅이란 ①소비자가 지닌 결핍을 끄집어내 불안감을 조성한 뒤 ②'이 제품을 쓰라'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자학성 문구가 성적 향상이나 체중 감량을 이루고 싶은 소비자에게 그 제품을 사고 싶게 만드는 강한 자극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친구끼리 주고받는 듯한 구어체(口語體)의 빈정거리는 말투가 효과를 더한다. 문구 제조업체 쓰임 & 끌림의 조기상 대표는 "학생들이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말을 듣고 제품에 응용했다"고 말했다. 이 제품들 중 상당수가 그림과 글씨에서 1970~80년대의 복고풍 느낌이 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정경원 세종대 석좌교수(산업디자인)는 "세련됨 대신 투박함을 택한 디자인이 직설적인 문구와 어울려 젊은 세대에게 오히려 새롭게 다가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언의 항의… 그리고 '자기 위로'

잔소리를 하려는 기성세대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부모의 잔소리는 싫지만 그게 옳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익명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며 "그 속에는 '나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심리학적으로는 자신을 비하해서 안도감을 찾는 셀프 핸디캐핑(self handicapping)의 일환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차명호 평택대 교수(상담심리학)는 "그런 제품을 사용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다행이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며 스스로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병두 숭문고 교사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고립된 주인공이 배구공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렇게 날 선 말들이 적힌 제품을 쓰는 것도 결국 사물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