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칸 한 칸 다가오네… 스릴 넘치는 좀비 액션

'끝까지 살아남아라.'

영화 '부산행'(20일 개봉)의 포스터에 적힌 홍보 문구처럼, 이 영화는 올여름 블록버스터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스릴과 가족애, 교훈까지, 성수기 영화가 갖춰야 할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는 이 영화는 '힘겹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생존한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돼지의 왕'과 '사이비' 등 애니메이션만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실사(實寫) 영화 데뷔작이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확산되자 긴급재난경보령이 선포된다. 이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은 좀비처럼 변한다. 펀드매니저 석우(공유)와 그의 딸이 오른 부산행 KTX에 바이러스 감염자가 타고, 열차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부산까지 살아서 도착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이게 된다.

'부산행'의 좀비는 움직임이 매우 빨라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는 기존의 좀비보다 공격성이 뛰어나다. 국내 대중 영화에서 '좀비'라는 소재는 낯설다. '부산행'은 이런 약점을 공간으로 돌파한다. 폐쇄적이며 직선 운동만 가능한 '열차'가 줄 수 있는 액션의 쾌감을 최대한 활용한다. 여기에선 적을 피해 돌아갈 길도, 숨을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상화(마동석)와 큰 키에 날렵한 움직임을 가진 석우(공유), 그리고 야구 선수라는 영화 속 설정 때문에 무지막지하게 배트를 휘두르는 영국(최우식). 셋이서 한 칸, 한 칸씩 이동하며 이들을 격파해가는 액션 장면은 마치 난이도가 높아지는 관문을 통과하는 게임을 연상케 한다.

이 영화는 지난 5월 칸 국제영화제 공식 부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서 상영됐을 때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당시 미완성이었던 CG도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통해서 연상호 감독을 알게 된 이들이라면 전작(前作)보다 덜 난폭하고 더 따뜻한 이 영화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인간의 이기심을 날카롭게 벼린 칼로 겨냥할 수 있는 지점을 놓친 것은 분명 아쉽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족주의와 주인공들의 숭고한 희생은 성수기에 개봉하는 대중영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지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쉬운 것은 이분법적인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다. 특히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용석(김의성)은 미움받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그는 걸핏하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를 지르는 '나쁜 놈'으로 묘사가 된다. 진짜 '나쁜 놈'은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여성과 아이(심지어 여자아이다)는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이고, 이들은 남자의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국 여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약하기만 했는지 의아스럽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등 좀비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미국의 조지 로메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현존하는 모든 재난이 곧 좀비"라면서 "좀비 영화는 사람들이 이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그려낸 것"이라고 했다. 좀비가 나오는 영화치고 좀비가 끝까지 무서운 적은 별로 없다. 좀비는 은유이자, 장치에 불과하다. 연상호 감독은 "'세월호' 이전에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사고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다. 긴급 재난 상황에서 정부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영화 중반부터 정부는 아예 개입하지도 않는다.

결국 무정부 상태에서 궁지에 몰린 인간들이 각자의 본성을 드러내는 지옥도를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 좀비가 이용됐을 뿐이다. 제아무리 빠르고 힘센 좀비라도 인간 앞에선 별 게 아니다. 특히 지킬 것, 가진 것이 많은 인간일수록 좀비보다 더 끈질기고, 더 잔인한 법이다. 살아남은 승객들끼리 모여 있는 기차 칸에 남아 있으라는 친구의 말에 여고생 진희(안소희)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더 무서워."